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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 북서쪽의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약 960㎞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는 ‘진화론’의 실마리를 열어준 곳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1835년 해군의 측량선을 타고 세계를 탐험할 때 이 섬의 희귀 동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4년간 연구한 끝에 ‘종의 기원’을 발표했다. 30개의 섬과 다수의 암초로 구성된 갈라파고스는 당시 원주민이 살지 않아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해류와 바람이 거세 대륙에서 동식물이 유입되기 힘든 환경이었다. 독자적으로 ‘생물 진화의 야외 실험장’이 된 것이다.
고립됐다는 측면이 부각되면서 갈라파고스는 부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갈라파고스 규제는 세계 흐름과 동떨어진 규제,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자국 위주의 고립된 기술·서비스 발전을 뜻한다. 그런데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이 벌어지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똑같이 부정적 의미의 갈라파고스에 비유되는 곳이 있다. 바로 여의도 국회다. 모든 것이 인공지능(AI)으로 통하는 AI 세상인데도 AI 진흥과 규제의 헌법 역할을 할 ‘인공지능산업 진흥 및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법률(AI 기본법)’의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 데이터 활용 기준 미비 등 불확실성으로 인해 AI 연구·활용에 애로가 생긴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AI, 반도체, 첨단 바이오, 양자, 우주항공 등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에서 반도체 등 일부를 제외하면 중국에 크게 뒤지고 있는 흐름이 심화할 우려도 있다. 미래 성장 동력 확충, 국민 삶의 질 제고,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첨단 과학기술 육성이 시대정신인데 여의도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느끼기 쉽지 않다.
AI는 제조업과 첨단산업, 교육, 의료, 유통·서비스, 국방 등의 게임 체인저이자 전기·인터넷·교통망처럼 종속돼서는 안 되는 사회간접자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챗GPT4o 같은 4세대 생성형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AI 선도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글로벌 빅테크들의 천문학적인 투자로 인해 AI가 인간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이 수년 뒤 펼쳐질 수 있는데도 우리의 대응 전략은 미흡하다. AI 고급 인력이나 전기·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연구 인프라도 크게 부족하다. 네이버·LG 등 우리 기업들이 3년여 전까지만 해도 미국·중국에 이어 선전했으나 이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생성형 AI 활용 능력도 세계 20위권 밖이라 국가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추세라면 AI 기술 종속으로 이어져 자칫 AI 소비 시장에 머무르지 않을까 염려된다. 미국·중국·일본·유럽·중동의 AI 및 반도체 총력 체제를 직시해 과학기술·산업·교육·노동정책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혁신적인 국가 운영체계를 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장은 여야 정치권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방송·플랫폼 등 언론 이슈를 분리해 과학기술 정책이 표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현재 과방위에서 과학·기술·원자력을 다루는 법안1소위가 방송·정보통신을 다루는 법안2소위보다 회의 숫자도 많고 법안 처리율도 높지만 결국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패키지로 묶여 파행을 겪기 때문이다. 물론 여야가 지난 21대 국회 과방위에서도 국가전략기술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국가전략기술육성법’ 등을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대체로 과학기술 이슈는 방송에 밀려 뒷전이었다. 정치권은 과학기술 연구개발(R&D) 예산 급감과 의정 갈등으로 인해 과학기술계가 뿌리째 흔들리는데도 혁신 생태계 구축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여야의 끝없는 정쟁을 막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는 상임위에 두고 방송 쪽은 특별위원회로 분리해 상임위원들이 겸직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 예산결산특위·윤리특위·인구위기특위·재난안전특위·민생경제특위 등이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 정치권이 국회 과방위 분리 같은 해묵은 과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면 진화론의 적자생존 원칙에 따라 국가적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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