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닷컴 버블 사태의 후유증은 여전히 벤처캐피털(VC) 업계엔 악몽으로 남아 있다. 당시 나스닥 시장 폭락으로 시작된 닷컴 버블의 붕괴는 코스닥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회수 시장에서 촉발된 경색이 투자와 펀딩 시장에도 영향을 주며 VC 업계에 긴 암흑기를 초래했다.
11일 VC 업계에 따르면 벤처 투자 호황기를 지나 혹한기를 맞고 있는 지금, 후폭풍이 찾아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VC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 및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40~50개의 VC가 폐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닷컴 버블 당시와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00년 150개 수준이던 창업투자회사(창투사)는 닷컴 버블이 끝난 뒤인 2005년 102개만 남았다.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의 혹한기는 작년부터 시작됐으나, 최근 들어서야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내는 지난 2020년부터 스타트업 붐을 타고 신생 VC가 우후죽순 설립됐다. 제로(0) 금리에 힘입어 유동성이 모험자본으로 유입되면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약 100여 개의 창투사가 생겼다. 이는 현재 영업 중인 VC(총 249개)의 약 40%에 달하는 규모다.
VC의 수가 늘어나고, 자금이 몰려들면서 무분별한 투자로 인한 역효과가 나타났다. 덩치만 커지고 내실은 부족한 기업들을 양산한 것이다. 지난 투자 유치 때보다 기업가치를 낮추는 소위 ‘다운 라운드’에서도 투자를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부지기수로 늘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작년과 올해(3월까지) 2년 연속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 스타트업 5곳 중 1곳(20.7%)은 기업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기부가 집계를 시작한 2015년(18.8%)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그나마 이들은 투자를 받는데 성공한 곳들이다. 후속 라운드를 진행하지 못하는 곳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 유치에 실패해 은근슬쩍 적자를 내고 있어도 상장할 수 있는 기술특례를 신청하는 곳도 부지기수다.
업계에서는 국내 경제 규모나 벤처 시장 크기를 고려할 때 VC가 터무니없이 많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동성은 풍부한 데 진입장벽이 낮으니 VC가 난립하게 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벤처 투자 혹한기를 정면에서 맞으며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자본잠식에 빠진 VC는 10곳을 넘어섰다. 올해 초 폐업한 VC도 5곳에 달하며, 단 한 개의 펀드도 결성하지 못하고 투자 이력이 없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VC는 지난해에만 45개사로 나타났다.
국내에 VC가 난립하게 된 이유는 창투사 등록 요건이 완화된 점이 한몫했다. 창투사 등록 요건을 보면 2005년 최소 자본금이 100억원에서 70억원으로, 확보해야 하는 전문인력 수가 3명에서 2명으로 각각 줄었다. 이후 최소 자본금 기준은 70억원에서 50억원으로 또 20억원으로 낮아졌다.
다만 업계에선 규제 강화로 진입장벽을 높이거나 퇴출을 하는 방식보다는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초 문턱을 낮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VC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창투사 설립 요건을 완화한 데는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VC를 통해 벤처 생태계를 확장하자는 의도가 있었다”면서 “문턱을 높이는 식으로 소형사 중심으로 대규모 퇴출이 진행되면 초기 기업을 발굴하는 소형 VC가 대거 사라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벤처투자 업계가 위기로 언급될 만큼 유동성 위축을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내실 있고 경쟁력 있는 운용사를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업공개(IPO) 규제에 따라 회수 시장의 난도가 올라가고, 모태펀드 등으로부터 정책 자금을 받아도 금융기관이 위험가중자산(RWA) 관리를 위해 출자를 줄이면서 민간 매칭이 힘들어진 상황”이라며 “이럴 때 오히려 탄탄하고 전문성을 가진 VC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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