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살펴보면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슈퍼카, 짤막한 허리로 경쾌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핫해치, 우아한 품격을 풍기는 럭셔리 세단까지. 탈것에 열광하는 ‘차쟁이’들은 자동차가 가진 고유의 매력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것이 비록 투박하고 불편함만 가득할지언정 그 차가 가진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이다.
지프의 랭글러가 대표적인 예다. 한때 랭글러 루비콘을 드림카 리스트 맨 꼭대기에 적어 놓고 만나는 친구들한테 ”꼭 랭글러를 살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 불편한 차를 왜 사냐”라고.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랭글러라서”. 이 말뜻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랭글러는 오랜 시간 가치와 매력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까닭이다. 투박하고 불편함 속에 아주 매력적인 달콤함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매력은 아주 중독적이다.
헤리티지를 지켜온 외관, 곳곳에 지프에 상징성을 담다
부분변경을 거친 랭글러의 외모는 과거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랭글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윌리스 MB’ 때부터 이어온 디자인 요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헤리티지다.
동그란 헤드램프와 세로로 긴 일곱 개의 슬롯을 배치한 그릴은 변함이 없다. 다만 부분변경을 거치면서 그릴에는 블랙 컬러의 포인트를 넣었고 헤드램프 가장자리에는 링 형태의 주간주행등을 넣어 멋을 더했다.
측면에서 보이는 변화는 휠 디자인뿐이다. 오히려 좋다.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지프를 상징하는 사다리꼴 휠 하우스를 비롯해 각지고 껑충한 차체, 오프로드 주행을 염두한 플라스틱 가니시 등을 헤쳤다면 매력이 반감됐을 것이다.
랭글러의 디자인에는 재미난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바로 이스터에그다. 곳곳에 숨겨진 메시지가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랭글러의 이스터에그는 전면 유리에 새겨진 ‘빅풋’과 ‘윌리스 MB’다. 휠 캡에도 ‘지프’라는 브랜드명 대신 윌리스 MB 이스터에그를 더했다.
특히 조수석 앞유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에는 ‘쪼리’ 이스터에그가 눈에 띈다. 이는 미국의 전설적인 오프로드 저널리스트 ‘릭 페웨(Rick Pewe)’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것인데, 그는 어릴 적부터 지프를 구매할 정도로 지프의 열렬한 팬이자 아웃도어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오프로드의 산 증인이다. 지프는 그를 위해 상징적인 모델인 랭글러 루비콘에 그를 위한 이스터에그를 새긴 것이다.
무심한 듯 배려한 실내, 기분 좋은 변화
랭글러의 실내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움보다는 기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철저히 오프로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다. 이를테면 도어와 차체를 연결하는 끈과 창문 조작 스위치다. 지프는 도어를 쉽게 떼어낼 수 있게 끈으로 연결했고 커넥터 등의 분리가 필요하지 않도록 창문 조작 스위치를 센터페시아에 위치시켰다.
기능성에 초점을 맞춘 가운데 부분변경을 거치면서 놀라운 배려가 더해졌다. 수동으로 조작해야 했던 시트는 자동으로 바뀌었고 센터 디스플레이는 12.3인치로 크기를 키웠다. 특히 이전 모델 대비 유커넥트 5 시스템을 적용해 반응 속도가 한층 빨라졌고 무선 애플 카플레이와 같은 휴대폰 연동 기능과 티맵 내비게이션을 더한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공간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다. 차체가 높기 때문에 머리 공간은 매우 넉넉하고 2열 무릎공간 역시 부족하지 않다. 트렁크 공간 큰 짐을 무리 없이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다. 기본 트렁크 용량은 81.4리터(ℓ)다.
궁극의 럭셔리 자연을 즐기기 위한 성능, 오프로드의 진가를 느끼다
국내에 판매되는 지프 랭글러는 모두 동일한 파워트레인을 탑재하고 있다. 2.0ℓ 직렬 4기통 가솔린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272마력, 최대토크 40.8킬로그램미터(kg.m)를 발휘한다. 엔진과 손을 잡는 변속기는 8단 자동이다. 힘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으면 각진 차체는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속도를 높였다.
도심을 달리면서 한 가지 변화가 느껴졌다. 바로 타이어다. 이전 모델은 머드 타이어가 기본 적용됐는데, 부분 변경을 거치면서 올터레인 타이어로 갈아 신었다. 덕분에 도심 주행에서 타이어 구름 소음과 진동이 크게 줄어 승차감이 한층 높아졌다.
서울을 등 뒤로 하고 한참을 달린 후 랭글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놀이터인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하늘을 보며 한참을 올라야 하는 산길, 곳곳에 흐르는 물, 여기저기 패인 웅덩이가 가득했다. 일반 승용차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장소다.
랭글러와 제대로 놀아보기 위한 준비 과정을 모두 마쳤다. 트랜스퍼 기어 조작 레버를 4L로 바꿔 뒷바퀴로만 전해지던 힘을 앞바퀴에도 나눠줬다. 그리고 프론트 스웨이바를 분리하고 오프로드 플러스 모드를 선택했다. 4대 1 락 트랙 HD 풀타임 네바퀴굴림 시스템은 기민하게 움직이며 노면을 움켜쥐고 있었다. 깊은 웅덩이를 만나자 서스펜션은 길게 다리를 뻗듯 바퀴를 노면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8단 자동변속기는 77.2대 1의 크롤비로 힘을 네 바퀴로 전달했다. 크롤비는 쉽게 설명하면 힘이 좋다는 뜻이다. 또 이전과 달리 전방 카메라를 활용해 운전석에서 볼 수 없는 전방 상황을 지켜보며 산길을 정복했다. 진입각과 램프각, 탈출각이 각각 43.9도, 27.8도, 37도에 달하는 덕분에 큰 바위를 만나도 문제가 전혀 없었다.
랭글러의 매력에 매료되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산길을 뛰어놀았다. 물론 랭글러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랭글러는 요즘 오프로더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기능성에 대한 타협도 없으며 화려한 도구로 멋을 내지도 않았다. 많은 오프로드 마니아가 랭글러를 사랑하는 이유다.
집에 있기를 좋아하고 곱상한 취미를 가진 이라면 랭글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좋다. 그런 이들에게 랭글러는 그 어떤 감동도 전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랭글러는 모험과 탐험을 즐기고 자연과 한 걸음 가까이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자동차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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