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명가 재건에 나서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강력한 소부장 생태계와 적극적인 정부 투자,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와의 파트너십 등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 모색에 나서고 있다.
1일 일본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지난 2022년 1조3000억엔(한화 약 11조원) 수준의 역대 최대 반도체 예산을 배정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2조엔(한화 17조원)에 가까운 예산을 배분했다. 또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12조엔(103조원)에 가까운 민관 투자 규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생산량 1위(세계 시장 점유율 약 50%)를 기록했다. 하지만 D램 기업 엘피다 파산에 이어 쇠퇴를 거듭하며 2022년에는 한국, 대만에 밀리면서 점유율이 9%대까지 떨어졌다. 선단 공정의 경우 한국, 대만은 3나노 이하를 향해가고 있지만, 일본에서 생산 가능한 최첨단 공정은 40나노 수준에 그친다.
◇ 반도체 패권 되찾기 위한 日의 ‘큰 그림’
미·중 반도체 분쟁 이후 반도체 산업이 국가 전략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일본 정부도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일본은 최첨단·차세대 반도체를 양산하기 위한 합작회사 ‘라피더스(Rapidus)’를 설립했으며, 각 지역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거점 유치를 유도하고 있다. 실제로 대만 TSMC의 진출 후 규슈 지역에서는 반도체 관련 회사 80여 개사가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그 외에도 첨단 반도체 양산을 지원하는 기금에 약 7652억엔, 최첨단 반도체 국산화를 목표로 하는 라피더스 등을 지원하는 기금에 약 6461엔, 반도체의 국내 안정 공급을 지원하는 기금에 5754억엔 등을 포함 전체 약 1조9867억엔(한화 17조원)을 자국내 반도체 생산거점 정비 지원에 투입할 전망이다.
김채윤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공급망 재구축은 전자·전기산업의 생산 기반을 풀 라인업으로 가지고 있는 제조업에 강한 일본 입장에서 결코 불리하지 않다”며 “반도체 제조 장비와 소재, 부품에서의 강점을 살리면서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기세를 회복할 수 있다면 세계 공급망의 핵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가장 근간이 되고 있는 소부장 분야에서는 특히 도쿄일렉트론(TEL)을 중심으로 선단 공장에서의 강력한 역량을 뒷받침하고 있다. TEL은 반도체 전공정 제조 장비 세계 3위, 일본 내 최대 규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웨이퍼를 칩으로 가공하는 ‘후공정’에 대응하는 장비 등 2개 품목도 육성해 이 분야에서도 점유율 1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 성능 향상을 견인한 것은 전공정 기술이었지만 이제는 칩을 여러 개 묶어 성능을 높이는 후공정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서다.
TEL은 일본의 최선단 공정을 이끌고 있는 라피더스와 밀접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기도 하다. 업계 관계자는 “TEL의 장비를 바탕으로 라피더스는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공정 소요 시간이 가장 빠른 TAT(Turn Around Time: 반도체 웨이퍼 25장을 일괄 처리하는 배치식에서 모든 반도체 웨이퍼를 1장씩 제조하는 매엽식으로 전환)를 적용해 제조 시간을 크게 단축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전했다. 2나노 본격 양산은 2025년 삼성전자, TSMC가 먼저 시작할 것으로 예상되나 2027년에는 라피더스가 GAA(Gate All Around) 신기술을 개발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 ”한국·대만에 의존하는 반도체 수급 구조 바꾼다”
일본의 가장 큰 목표는 첨단 반도체의 자급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우선 구마모토현에 TSMC의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며 미에현에는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이 합작한 3D 낸드플래시 공장이 설립된다. 히로시마현에는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의 최선단 D램 공장 인프라 건설이 한창이다.
이 중에서도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은 투자액이 가장 많은 86억달러로, 규슈 지방에서 산업용 첨단 반도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정부의 강한 의욕을 보여준다. 또 2021년에는 TSMC가 과반수 지분을 소유한 일본 자회사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을 설립해 반도체 관련 글로벌 기업 약 46개 사가 규슈 지방에서의 신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삼성 반도체의 한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한국에 팹을 건설하는 것보다 일본에 짓는 것이 전체 비용의 약 50%를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지 정부의 지원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며 “이같은 적극적인 투자유치와 일본 현지의 강력한 소부장 생태계, 선단 공장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TSMC와의 합작 법인 설립 등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탄탄한 기초 체력 생태계를 확보해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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