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발발한지 올해로 74년이 흘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 전쟁으로 인해 동족이 서로 상잔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74년 전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후손들은 지금의 이 평화를 누리고 있지만, 후손들에게 이 피가 주는 소중함이 점점 옅어져 가고 있다. 이에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조국을 위해 맹렬히 싸운 용사를 만나 전쟁 당시의 참혹함과 전쟁 용사들 덕에 얻게 된 소중한 자유와 평화의 가치에 대해 돌아봤다.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수영구지회장 홍순해 씨는 1932년생으로 올해 93살이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19살 나이로 입대했다. 당시 그는 8사단 10연대 2대대 8중대 3소대에서 중화기중대 탄약수로 복무했다.
입대 당시의 분위기를 묻자 홍 회장은 “북한군이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우리 한국군이 저 두만강 압록강 부근까지 갔었다. 그러다 중공군이 넘어오는 바람에 철수하게 됐고, 이를 1·4후퇴라고 불렀다”라고 회상했다. 젊은 사람들을 인민군으로 데리고 가던 그 당시,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제주도로 갔고, 그곳에서부터 훈련받기 시작해 1952년 5월 사단 배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제1 육군 하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전방으로 투입되어 바로 분대장을 달았다고 덧붙였다.
입대 후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대해 홍 회장은 “전쟁에 안 위험한 때가 어딨느냐”고 반문하면서도 철원과 금성 쪽 1400 고지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낮에는 비행기가 와서 폭격하니까 적군들이 쫓겨나고 아군이 지키고, 밤이 되면 비행기가 못 떠서 적들이 올라왔다. 뺏고 뺏기는 일이 매번 반복됐다”고 말했다.
또한, 속초 위 간성에서의 진지 구축 과정에서도 큰 위험을 느꼈다고 했다. “밤 9시 넘어서 자려고 누웠는데 비상 나팔이 울렸다. 군장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밤중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서로 총 쏘는 소리만 들렸다”고 말했다. 그는 “밤중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총쏘는 소리만 들렸다. 완전 두더지 작전이다.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소리만 듣고 저쪽에 있겠다 싶으면 그냥 쏘다 보니 눈먼 총탄에 맞아죽기도 했다”며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홍 지회장은 젊은 세대의 안보 의식이 약해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6.25 참전 유공자들이 모여서 6.25 관련 사진과 영상을 지하철에서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이 잘 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그는 “학교에서 안보 교육을 하고 싶은데 전교조 영향으로 못 하는 것이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지원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정부 지원에 만족하는 게 하나도 없다. 독립유공자는 후손 손자까지 혜택을 보는데 우리는 당대만 혜택을 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후계자를 법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안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에서 우리가 받는 혜택은 현재 매달 42만원 받는 게 전부”라며,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는데 보상이 너무 미미하다고 말했다. 또한, 보훈병원에서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만 주로 입원하고, 자신들은 자리도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홍 지회장은 “지하철역에서 사진 전시를 15년 동안 했는데, 부산역에서도 한번 해보고 싶다”며, “초등학생 때부터 안보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 이렇게라도 안보 교육을 널리 퍼뜨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후계자 관련 법안이 빨리 통과됐으면 좋겠다. 독립유공자는 손자까지 혜택을 보는데 우리는 당대 우리만 혜택을 조금 받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법안이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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