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들이 공장 가동에 충분한 수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신용등급 및 기업가치에도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반도체 제조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필요한 물의 양도 크게 늘어나는 반면 기후변화 등 영향으로 수자원은 부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자원 문제는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주요 기업의 반도체 공장 부지 선정과 투자 계획에도 이미 핵심 변수로 자리잡았다.
10일 주요 외신과 신용평가사 보고서를 종합하면 가뭄을 비롯한 이상기후 현상이 수자원의 희소성을 높이고 있어 대형 반도체 제조사들의 기업가치에도 점차 리스크로 주목받게 됐다.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인 대만 TSMC가 2030년에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이 2022년 대비 최대 2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원활한 수자원 공급이 어려워지면 TSMC 반도체 생산량은 예상치보다 최대 10%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S&P는 “수자원 부족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이는 반도체 제조 기업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전에는 주로 기후변화 대응 관점에서만 논의되던 물 부족 문제가 글로벌 핵심 산업인 반도체 분야에 중장기 리스크로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수자원 집약적 산업이다. 일반 물을 극도로 정제한 초순수를 활용해 화학약품과 불순물을 씻어내야 수율을 높일 수 있다 보니 대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초순수 필요량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등에 쓰이는 초미세 공정은 구형 생산공정보다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주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은 이에 따라 공장 부지 확보를 비롯한 설비 투자 계획에 수자원 관련 변수도 적극 반영하고 있다.
TSMC가 일본 큐슈에 최소 2곳의 대형 반도체 생산공장을 신설하기로 확정한 점이 대표적 사례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큐슈섬의 지하수 수량은 871억 톤으로 제주도에서 연간 사용하는 지하수량의 335배에 이른다.
그동안 TSMC는 모든 첨단 반도체 생산공장을 대만에서 운영했는데 더 이상 충분한 산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는 부지를 찾기 어려워지자 일본까지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고 있다.
장중머우 TSMC 창업자는 지난해 말 대만 신주시에서 열린 연례 체육대회 행사에 참석해 “일본은 물이 풍부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높다”고 언급했다. 공장 부지 선정에 수자원이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미국과 독일 등 여러 국가에 반도체공장 신설 계획을 내놓은 인텔은 2030년까지 물 순환률 100%를 달성하는 ‘워터 넷제로(Net zero)’ 달성 계획을 밝혔다. 이는 지난해 말 발간한 ‘기후 전환 액션플랜’ 보고서에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텔은 수자원 보호를 위해 2021~2022년에만 9900만 달러(약 1316억 원)에 이르는 비용을 들여 물 재사용 처리시설 등을 설립했다.
삼성전자도 이와 비슷한 계획을 추진하며 수자원 사용량을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공공하수를 받아오는 등 방식을 통해 2030년까지 취수하는 물의 양을 2021년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10년 동안 취수량 증가율을 ‘0’에 수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수자원 확보 문제는 미국 반도체 지원법(CHIPS Act)과 같은 산업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
IT전문지 더레지스터에 따르면 미국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마이크론은 뉴욕주에 1천억 달러(약 133조 원) 규모의 생산단지 구축을 추진하며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에 보조금을 신청했다.
미 육군 공병대(USACE)가 작성하는 환경영향 평가서는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에 근거한 제조설비 건설 보조금을 지급할 때 의무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문서다.
환경영향 평가에는 반도체 공장이 인근 지역 수자원에 미칠 영향이 중요한 기준으로 포함되어 있다.
수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해 지역 주민의 생활용수를 고갈시키거나 폐수 방류로 수질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는 보조금 규모가 줄어들거나 지급되지 않을 수 있다.
삼성전자와 TSMC, 인텔도 모두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며 정부 보조금을 받는 일이 필수로 꼽힌다. 따라서 수자원 확보 및 재활용, 정화 등에 크게 신경을 쏟아야 한다.
더레지스터에 따르면 마이크론도 이를 고려해 주변 하천의 환경 개선과 복원사업 진행 계획을 수립하며 환경영향 평가에 대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의 반도체 공장이 건설되는 애리조나와 텍사스주는 모두 해마다 가뭄 문제를 겪는 지역이다. 기후변화로 가뭄과 같은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해질수록 수자원과 관련한 여러 리스크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S&P는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의 영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측할 수 없고 추상적으로 다가오지만 반도체 제조업체들에는 그 영향이 훨씬 더 구체화될 수 있다”고 짚었다. 이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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