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을 전전하던 짐 롤러는 서른 살이 되던 해 CIA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버지니아주에 있는 캠프 피어리에서 자물쇠 따기, 첩보원의 접선법, 미행 및 감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교육 과정의 대부분은 대화 기술에 관한 것으로 CIA요원의 일은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배웠다.
롤러는 높은 점수로 교육을 마쳤고 유럽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외국 관료와 인맥을 형성하고 대사관 담당자와 친분을 쌓아 기꺼이 내부 사정을 얘기해줄 정보원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보낸 처음 몇 달은 하루하루가 처절했다. 롤러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과 어울렸다. 공식 만찬에 참석하고 대사관 근처 바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다
용기를 내 중국 대표단 직원에게 정보원이 되길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한 번은 소련 영사관 직원에게 접근해 일이 잘 풀리나 했더니, 사실 상대는 소련 KGB 소속으로 오히려 롤러를 포섭하려는 목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고 위기에 처해있던 롤러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CIA동료로부터 중동 국가 외무부에서 일하는 야스민이라는 여성이 휴가차 유럽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자신을 석유 투자자라고 소개하고 야스민에게 접근한 롤러는 식사 자리에서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일은 마음에 드는지, 최근 보수 혁명을 겪은 나라에서 사는 게 어렵지는 않은지…
야스민은 권력을 잡은 과격한 종교주의자들을 싫어한다고 털어놓았고, 이를 기회로 여긴 롤러는 자신이 다니는 석유 회사에서 시간제 컨설턴트로 야스민을 채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샴페인까지 주문했다.
야스민과 헤어진 롤러는 사무실로 달려가 상사에게 드디어 첫 번째 정보원을 포섭했다고 보고했다.
상사는 기뻐하며 “축하하네. 이제 자네 정체를 밝히고 그 나라 정부에 관한 정보를 달라고 하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야스민에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다신 그와 말도 섞지 않을 것 같아 롤러는 차일피일 사실을 밝히길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야스민은 롤러를 신뢰해 나날이 더 솔직해졌다. 그녀는 언론과 자유를 탄압하는 정부를 부끄럽게 여기고 혐오했다.
롤러는 이것을 신호로 읽고 야스민에게 자신이 미국 정보국 요원이라고 고백했다.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지만 미국 정부도 그녀와 원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고. 그러니 CIA를 위해 일해달라고.
예상과 달리 야스민은 롤러의 고백을 듣자마자 그런 일을 하던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았기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그 자리에서 격렬히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많은 액수를 제시하고 어떤 약속을 해도 소용없었다. 롤러는 CIA 교육에서 누군가를 포섭할 때 자기가 그 사람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확신을 주라고 한 게 떠올랐지만 도저히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롤러는 CIA가 된지 1년 만에 겨우 정보원 포섭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일을 완전히 망쳐버렸고 이대로는 해고당할 게 뻔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야스민에게 밥 한 번만 같이 먹자고 사정했고 다행히 야스민은 저녁 식사에는 응했다.
야스민은 저녁 내내 초조한 모습으로 조용히 밥만 먹었다. 롤러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자신에게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롤러는 야스민의 기운을 붇돋아 주려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울적해보였다.
롤러는 야스민을 바라보다 문득 그 동안 자신이 야스민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야스민의 불안과 희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지도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롤러는 본인의 생각과 기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첩보원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고 자신감도 없다고. 외국 관료에게 서투르게 접근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신고당해 추방당할까봐 걱정했다고.
KGB 요원에게 역으로 포섭당할 뻔 했을 때는 수치스러웠다고.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자신이기에 귀국을 앞둔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한다고.
그렇게 롤러는 야스민에게 자신의 좌절과 실망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야스민은 롤러의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해한다고, 자긴도 뭔가를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달래며 ‘괜히 말했네. 내가 실수했어’ 라고 생각하고 있던 롤러에게 야스민은 정신을 추스리고 나직히 속삭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야스민은 롤러의 정보원이 되어 20년간 CIA에 협력했다.
롤러는 그날 밤 무엇이 야스민의 생각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야스민 자신도 정확히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는데
다만 식사 중 두 사람 모두 자신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불현듯 그와 함께라면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고 그 순간 처음으로 그녀는 롤러가 자기에게 하려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
이 일은 중요한 일이고, 당신은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야스민은 그가 진심으로 자기 말을 들었다고 느꼈다.그렇게 두사람은 서로 신뢰하기로 합의했다.
이 CIA의 이야기는 찰스 두히그의 <대화의 힘>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찰스 두히그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본인이 소통으로 먹고사는 사람임에도 종종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실패했고, 대화가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이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든 걸까.
모든 사람이 때로는 친구나 동료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고,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이 진짜로 말하려는 것을 듣지 못한다.
게다가 우리 자신도 남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상대와 마인드셋이 일치하면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과 그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그리고 반대로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듣도록 허용하게 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무조건 상대의 몸짓이나 기분, 말투를 따라 한다고 해서 가까워지거나 통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바라고 몰두하는 것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도 소용없다. 그런 건 진짜 대화가 아니다. 그저 서로 독백으로 겨루는 것일뿐이다.
롤러가 그날 저녁 야스민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상대에게는 자신이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대화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다.
적절한 타이밍에 시작된 적절한 대화에는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항상 기억하라!
불리한 상황을 단번에 뒤집고, 평범한 대화에서 결정적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무엇보다 누군가와 진실되고 의미 있는 관계가 되고 싶다면 찰스 두히그의 <대화의 힘>을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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