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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여대생, 방송 기자 ‘가짜 인생’…남친에 들통나자 돈 노리고 유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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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1990년 6월 25일, 장맛비가 퍼붓던 날 노란색 우비와 빨간색 신발을 신고 엄마에게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유치원 등원을 위해 집을 나선 곽재은 양(6)은 다시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재은 양이 다니던 유치원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어 집과 매우 가까웠다. 재은 양은 이날도 평소처럼 혼자 등원했고, 엄마는 낮 12시 하원 시간에 맞춰 10분 전 집을 나섰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하원 시간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딸 재은 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걱정된 엄마 유치원 찾아갔지만…이미 유괴된 상태

걱정이 된 엄마는 유치원 교사에게 재은 양의 위치를 물었지만, 교사는 어머니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어머니께서 급한 일이 있어서 보내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중간에 만날 거라고 하시면서…”

순간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침착하게 지인들에게 혹시 재은이와 같이 있냐는 수소문을 하다가 실종 5시간여 뒤인 오후 5시에 경찰에 유괴 신고를 했다.

당시 지인인 척 유치원에 전화를 건 범인 홍순영(23)은 우산에 적혀 있던 이름 등을 보고 재은 양의 신상을 파악했고, 유치원 교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아이를 하원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 실종 다음 날 걸려 온 전화…가짜 명의 계좌에 “5천만원 입금해라”

경찰은 유치원 관계자와 주변인들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한편, 유괴 사건일 가능성을 감안해 재은 양 집 전화에 공청 녹음 장치를 설치하고 대기했다.

실종신고 24시간여 뒤인 26일 오후 5시쯤 한 젊은 여성으로부터 재은 양의 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아이를 돌려받고 싶으면 경찰에 신고하지 말고 5000만 원을 송금해라” 아이의 목소리만이라도 들려달라는 엄마의 간절한 호소도 외면한 채 1분 만에 홍순영은 요구사항만 밝힌 채 전화를 끊었다. 당시 5000만 원은 서울 근교의 30평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10분 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홍순영은 A 은행 계좌번호와 가짜 명의로 개설한 예금주 ‘이OO’의 이름을 밝힌 뒤 다시 전화를 끊었다.

경찰은 계좌가 개설된 A 은행 전국 지점에 돈을 인출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경찰에 신고하도록 요청한 뒤 서울 시내 A 은행 전 지점에 형사들을 배치해 잠복근무하도록 했다. 인터넷뱅킹이 아직 도입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인출을 하려면 직접 은행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 서울 모든 은행 지점에 형사 잠복…현금 인출하던 범인 체포

전화가 걸려 온 다음 날 27일 오전 재은 양의 어머니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일단 500만 원을 입금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홍순영은 이내 전화를 걸어 “500만 원이 입금된 것은 확인했으니, 나머지 돈을 송금해라. 만약에 경찰에 신고하면 아이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얘기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재은 양의 엄마는 28일 오전 홍순영이 알려준 A 은행 계좌에 2500만 원을 더 입금했고, 경찰은 더욱더 고삐를 조이며 현장에서 홍순영이 돈을 인출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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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2시쯤 마침내 계좌에서 인출을 시도하는 상황이 포착됐다. 하지만 위치는 형사들이 잠복근무 중이었던 A 은행의 한 지점이 아닌 명동의 다른 은행의 현금자동지급기였고, 금액은 30만 원이었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뒤 마침내 명동 롯데백화점 내부의 A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10분간 260만 원이 인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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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주변에 있던 형사들은 인파를 헤치고 해당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고, 막 백화점을 나오던 여성을 추적해 인근 지하철역에서 체포했다.

당시 범인 홍순영의 인상착의는 작은 키에 자그마한 체구 앳된 얼굴로 도저히 흉악하고 잔인한 유괴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 “공범 있다” 거짓 진술 후 선로에 몸 던져 자살 시도

당시 검거된 홍순영은 공범이 있다는 거짓 진술을 했다. 이때 그가 지목한 공범은 교제 중이던 남자친구였다. 홍순영의 말만 믿고 경찰은 공범이 기다리고 있다는 서울역까지 그와 함께 이동해 지목된 장소에 도착했다. 그 순간 갑자기 홍순영은 청량리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는 선로 위로 몸을 던져 자살 시도를 했다. 하지만 기관사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끔찍한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경상을 입은 채 병원에 입원해 계속해서 입을 다물던 홍순영은 경찰의 계속된 추궁에 결국 “사건 당일 목 졸라 살해에 숙명여자대학교 한 건물의 물탱크 뒤에 시신을 은닉했다”고 자백했다.

제발 살아 있기만 하고 바랐던 재은 양의 희망은 결국 그 순간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곽재은 양은 유괴 5일 만인 30일 숙명여대 학생회관 옥상 물탱크와 벽 사이 틈바구니에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 거짓 대학생, 기자 행세 남자 친구에게 알려지자 돈 모으려 범행

홍순영은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친구들과의 사이에 경쟁과 질투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6년 대학을 두 차례 낙방한 홍순영은 우연히 자신이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의 학생증을 줍게 되고 그것을 위조해 가족에게 대학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무려 4년간 숙명여대 정외과에 다닌 행사를 한다. 그는 MT 등 학교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심지어 졸업식까지 꾸며내는 등 정말 거짓말 같은 거짓 인생을 살았다.

또 가짜 졸업 이후 KBS 기자로 취직했다는 가짜 직업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교제하며 혼담이 오가던 남자친구에게 그의 모든 것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이 들통났고, 상대 부모의 강한 결혼 반대에 부딪히며 완전하게 자신이 속일 수 있다고 믿었던 가짜의 삶이 깨지기 시작한다.

자신이 만든 상황이 결국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마음이 병든 홍순영은 남자친구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돈을 모으려 범행을 결심했고, 단지 그런 이유로 대상이 된 재은 양은 그녀의 손해 희생되고 말았다.

◇ 범행 1개월 전 초등학교 1학년 학생 1차 유괴…희생자 사례와 유사

특히 홍순영은 조사 결과 사건 발생 1개월 전인 5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을 5시간 감금한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홍 씨는 등교 시간 한 아이의 신발주머니에 적힌 학년, 반, 이름 등을 참고해 학교에 가족 행세를 하며 전화를 걸어 조퇴시켰다. 이는 희생된 재은 양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학교에서 나온 아이를 유인해 자기 집안에 감금했지만, 몇시간 뒤 홍 씨 아버지에 의해 아이가 발견되자, 결국 아이에게 입단속을 시키며 학교까지 바래다준 것으로 밝혀져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겼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상을 떠난 재은 양이 홍 씨에게 계획적으로 유괴됐음이 증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추후 전문가들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당시엔 쉽게 접할 수 없는 단어였던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 “사형 시켜달라”…범행 1년6개월여만에 유언 없이 ‘사형’

홍순영은 수사와 재판을 받는 내내 “제발 사형시켜 달라”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비슷한 범죄가 빈번했던 당시 1990년대에는 유괴살인 사건의 경우 우발적이거나 범죄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무조건 사형이 원칙이었다.

홍순영 역시 그해 12월 21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이듬해 9월 1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사형 판결을 확정 받았다.

1991년 12월 18일 사형집행 직전, 남길 유언이 있으면 말하라는 집행관들의 권유에도 홍순영은 울면서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고 한다.

홍순영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던 범행 1년 6개월여 만에 다른 사형수 8명과 함께 사형이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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