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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보기] ‘마에스트라 김은선’을 반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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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지난 4월 18일부터 독일 베를린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양의 한 여성이 사흘 동안 연속 지휘봉을 잡은 연주회가 열렸다. 한국인 김은선(44) 씨였다. 김은선 씨는 동양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첫 여성 지휘자였다.

140여 년 역사의 이 교향악단은 전설적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거장들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 교향악단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 그것도 한국에서 온 여성 지휘자가 정기연주회 사흘이나 연속해서 멋지게 지휘를 한 것이다.

당시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난 뒤라 우리나라는 온통 정치에 신경을 집중할 때였다. 요즘 인터넷으로 신문을 구독하는 시대여서 신문 한두 군데 문화면에 난 이 연주회 기사가 뉴스창 전면에 오르지 않아 다들 주목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 같다. 필자도 이 소식을 이제 들으며 뒤늦게 흥분하는 더딘 감수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정명훈 씨가 지휘한 이후 두 번째라고 하는데, 세계 최고 교향악단의 지휘봉은 그만큼 음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고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한국 여성의 베를린 필 지휘는 분명 우리 음악계의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성공적으로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 지휘를 마친 김은선. / 베를린 필 페이스북
 성공적으로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 지휘를 마친 김은선. / 베를린 필 페이스북

김은선은 베를린 필 데뷔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교향곡 3번과 쇤베르크(1874~1951)의 ‘기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클래식 팬들이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절정이다. 그의 피아노협주곡은 우리의 임윤찬 씨가 이 곡으로 역시 세계 최고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는데, 그의 대표 교향곡 3번을 훌륭히 지휘해 청중의 박수를 길게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함께 지휘한 쇤베르크도 까다롭고 난해한 현대음악의 문을 여는 작곡가이지만 일찍이 1940년대에 이건우 김순남 등 우리 음악인들이 좋아하던 작곡가였다는 데서, 그런 인연이 있는 두 곡을 독일의 청중에게 멋지게 지휘한 것이다.

김은선의 베를린 필 데뷔는 ‘젊은, 동양의, 여성 지휘자’라는 삼중의 어려움을 딛고 이겨낸 것이다. 우리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방영된 ‘마에스트라’라는 TV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이영애 씨의 연기를 통해 여전히 녹록지 않은 여성 지휘자의 삶을 현실에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실은 2019년 개봉된 음악 영화 ‘더 콘덕터’가 바로 여성으로서 최초로 베를린 필을 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의 삶을 다룬 작품이었다. 영화 개봉 때 음악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여성 지휘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 반응이 있었고, 베를린대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귀국해 활약하고 있는 김경희 씨 등 여성 지휘자들에 대해서도 그 이후 비로소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 출신 미국 지휘자인 안토니오 브리코는 1930년대 활동한 사람으로서 처절하게 노력을 했고 뉴욕 필 등을 지휘하기는 했지만 결국 수석지휘자 등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음을 이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 뒤 9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성 지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직 높지 않다. 이미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기악 부문에서는 여성 음악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만 세계 지휘계에서는 이제 비로소 시작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은선은 연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다가 대학 4학년 때 학내 오페라 공연에 참여하면서 지휘와 인연을 맺고 그야말로 맹렬하게 그 길을 달려간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 유학한 뒤 2008년 스페인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이어 세계 음악계를 누비며 ‘최초’ 기록을 잇달아 쓰고 있다고 한다. 2019년 미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극장 음악 감독으로 임명됐다. 이 극장 첫 여성 감독이자 첫 동양인 감독이라는 두 가지 기록을 동시 작성했다.

그는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등을 구사하는 ‘노력파’로도 유명하다. 2019년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를 지휘할 당시에는 입으로 체코어 아리아를 따라 부르는 모습으로 미국 음악계에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베를린 필 연주회를 위해서도 능숙한 독일어로 단원들과 호흡을 맞추었다고 한다. 음악은 미묘한 뉘앙스의 싸움이기에 그 뉘앙스를 표현하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고 지금도 다른 나라에 연주를 가면 하루 3시간 이상 자지 않고 그 나라 언어를 공부하는 지독한 노력파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 필은 창단 100년 만인 1982년에야 여성 단원을 받아들였고, 여성 악장 임명은 지난해가 처음일 정도로 여성에게 문턱이 높다고 한다. 여성이 지휘석에 오르는 것만으로 야유하고 밀어내려고 하던 것이 지난 시대의 관행이었다면 이제는 어느 누가 만들어내든 음악이라는 진실 앞에서 마음과 귀를 열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때에 정명훈의 뒤를 잇는 세계적 지휘자로 발돋움하고 있는 김은선 씨가 한국 여성으로서 그 지휘대에 선 것이다.

김은선 / 사진 김은선 인스타그램
김은선 / 사진 김은선 인스타그램

김은선은 여성이니 아니니 하는 차원을 스스로 넘어섰다. 한때는 여성 지휘자 관련 질문 받기를 거부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누군가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언론과의 회견에서 밝히기도 했다. 김은선은 “아시아 여성 지휘자라는 내 존재 자체를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과거 세대와, 나를 보며 지휘자의 꿈을 키운다는 어린 소녀들을 보면 기쁘다”면서 “나도 ‘여성 지휘자’가 아닌 그냥 ‘지휘자’로 불릴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음악 애호가이긴 하지만 음악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김은선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한 가지 악기만이 아니고 여러 악기를 만나게 하는 지휘를 통해 교향악이라는 큰 음악을 만들어가는 역량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교향곡은 작곡한 사람도 대단하지만 악보를 보고 소리로 구현하는 것이 더 힘들고 대단하다. 교향악은 가장 큰 종합 음악예술이기에 우리 사회로 치면 각계각층의 소리를 다 듣고 모아 이를 멋진 소리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오케스트라의 소리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모두 진실된 소리를 만들어 그것으로 큰 음악을 빚는다.

그러기에 온갖 거짓말과 막말, 비리와 부도덕이 난무해도 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이 된 우리 사회에서는 그처럼 진실된 소리를 찾아내어 이를 큰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지휘자 김은선 씨와 같은 지도자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 정치계에 김은선 같은 지휘자가 나와서 흩어지고 좌절하는 마음을 모아 대한민국을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면 좋겠다. 아직도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에 머물러서인지 자기들 패거리 이익에만 매몰된 정치인들을 온갖 편견을 뚫고 당당히 세계 무대에 오른 지휘자 김은선처럼, 세계에 내놓을 멋진 정치로 이끌 멋진 지도자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김은선 씨의 성취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이다.

데일리임팩트
content@www.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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