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정선영] 내 나이도 마흔을 넘긴 지 좀 됐다. 자의 반 타의 반 인생 후반전을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기에 최대한 많은 변수를 염두에 두어야겠다. 이럴 때 인생 후반전을 사는 다양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꽤 도움이 된다.
이번에 소개할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는 멀리 영국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오늘을 보여준다. 영국이든 일본이든 대한민국이든 노동 계급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현재를 보며 내 미래를 점쳐보기에 충분하다.
먼저 책 속 등장인물부터 살펴보자. 56년 생 파견직 자동차 수리공 출신, 58년 생 대형마트 파트타이머, 56년 생 복역 전력이 있는 도장공, 55년 생 블랙캡 택시 운전기사, 55년 생 택배기사 등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시대에 뒤처지고 배외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할 만한 문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며, EU 탈퇴를 주장하는 문제적 존재로 간주되는 사람들이다. 그 자식들은 이른바 무상 교육, 특히 대학 진학을 통해 계급 상승 가능성이 남아 있던 마지막 노동 계급 세대였다.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내가 하는 일은 전부 로봇이 하게 될 거야. 그러니 건설 노동자나 운전기사 같은 일로 먹고살 생각은 하지 마.”
지금 이들은 저녁이면 펍에 모여 앉아 한참 어린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나보다 출세하라면서 계급 재생산의 길을 끊어내려 한 아버지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현실감이 있다”고 지적한다.
나 역시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적 있다.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 전형적인 블루칼라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대 중반이던 어느 날 우연한 일로 아버지가 일하던 공장에 방문했던 내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펜대 굴리면서 산다.” 내 학업 성적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던 아버지가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늘 그런 생각을 온몸으로 내비쳐왔다. 아버지가 그저 ‘열심히’를 강조한 것도 이해는 된다. 그 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는 세대였기에 우리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고 나아가 잘살 수 있다 생각했으리라.
그렇다면 아버지 뜻대로 펜대 굴리며 사는 나는 노동 계급에서 벗어나 계급 상승을 이루었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베이비부머 세대 자식으로 태어나 대학을 나온 사람은 차고 넘친다. 아버지 세대와 달리 ‘펜대 굴리며 사는 노동자’라는 노동 계급의 한 부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고, 노년의 경제적 안락함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내 인생 후반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나는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에 나오는 등장인물 모습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주저앉지 않고 “내 인생 따위에 이런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라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내는 것이다. 복지사회의 혜택이 옛말이 되었어도 각자도생의 긴축 시대 한복판에서 직장을 잃었어도 뒷세대의 손가락질과 비웃음 속에서도,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저 오늘을 꿋꿋이 살아내는 그들처럼 말이다.
역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무릎, 아니 마음인가.
|북에디터 정선영. 책을 들면 고양이에게 방해받고, 기타를 들면 고양이가 도망가는 삶을 살고 있다. 기타와 고양이, 책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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