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자율주행 차량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가릴 법적 근거 마련에 나섰다. 자율주행 기술은 이미 사람의 개입이 필요없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관련 법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특히 사고가 발생할 경우 차량 제조회사와 운전자 가운데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26일 자동차 업계와 정부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자율주행 자동차 사고조사 처리지침(가칭)’ 제정에 나섰다. 지난해 자율주행 사고가 났을 때 처리 기준을 국토부 내부 매뉴얼로 만든 바 있는데 이를 구체화해 훈령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토부는 이 훈령을 올해 안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당 훈령은 ‘레벨3’ 이상 자율주행차를 대상으로 한다. 레벨3 자율주행은 고속도로 같은 특정 구간에서 운전자 개입 없이 자동차 스스로 운전하는 수준을 말한다. 레벨2는 자율주행 도중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떼면 경고음이 발생하지만 레벨3에서는 경고음이 나오지 않는다. 레벨2는 운전 통제권이 사람에게 있지만 레벨3부터는 시스템에 넘어간다. 이 때문에 국내 법체계에서 레벨2는 운전보조 기능이라 정의하고 레벨3부터 진정한 자율주행차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는 기아가 지난해 말 ‘EV9 GT라인’에 레벨3 기능을 넣으려 했으나 막판에 계획을 바꿔 무기 연기했다. 지난해 상반기(1∼6월)에도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G90’ 연식변경 모델에 레벨3가 들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왔으나 결국 해당 기능은 제외됐다. 해외에서는 이미 일본 혼다와 독일 메르세데스벤츠가 시속 60㎞까지 레벨3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의 모델을 소규모로 출시한 바 있다. 또 중국에서는 중국산 레벨3 자율주행 차량들이 베이징 도심에서 운행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한국에서 레벨3 자율주행 차량이 나오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불투명한 사고 책임 소재를 지목했다.
현행법에서는 레벨3 자율주행 차량에 일종의 ‘블랙박스’인 자율주행정보기록장치(DSSAD)를 장착하도록 했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국토부 산하 자율주행차 사고조사위원회에서 DSSAD를 바탕으로 책임 소재를 가리도록 했다.
하지만 차량 사고는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에 사고조사위원회가 어떤 기준으로 시비를 가릴지 의문이 많았다. 애매한 판정 결과 때문에 제조사가 ‘기술력 논란’에 휩싸일 우려도 컸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사고 처리 기준이 명확하게 나온다면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이를 반영해 레벨3 자율주행차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며 “레벨3 자율주행차의 상용화가 앞당겨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레벨3 자율주행 도중 차량이 스스로 차선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칙 손질에도 나섰다. 현재 규정에는 자율주행차가 차선을 지키도록 하고 있을 뿐 차선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은 없었다. 앞서 2022년 유엔자동차안전기준 국제협의기구(UN WP29)는 레벨3 자율주행 기능을 통해 차선을 바꿀 수 있도록 안전기준을 개정한 바 있다. 국토부는 하반기(7∼12월) 중에 규칙 변경을 목표로 현재 관련 완성차 업계와 협의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레벨3 자율주행 택시 운행과 관련해서는 지난해 ‘자율주행자동차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번 개정을 통해 자율주행 택시에 대한 면허를 국토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장이 허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이를 바탕으로 올 8월부터는 서울 강남구에서 미국과 중국에 이어 전 세계 세 번째로 심야 자율주행 택시가 운행될 예정이다.
한재희 기자 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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