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 기조에 발맞춰 반도체주와 저(低)주가순자산비율(PBR) 주를 담아왔던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이 보유 주식 상당수를 팔고 조선주와 화장품주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낙폭이 과대했거나 실적으로 성장성을 입증한 종목들을 담으며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이달 들어 22일까지 유가증권시장에서 8634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 중 절반은 반도체주다. 삼성전자는 4690억원어치, SK하이닉스는 570억원어치를 되팔았다. 이 밖에 연기금은 기아(480억원), KB금융(220억원), 현대차(200억원), 메리츠금융지주(200억원) 등 주요 밸류업 수혜주로 부각됐던 종목들을 순매도했다.
지난 2월부터 3개월 동안 증권시장에서 순매수세를 유지하던 모습과는 대조된다. 기관투자자인 연기금은 유가증권시장에서 올 2월 2580억원, 3월 2490억원, 4월 7030억원 등 2조원어치 이상을 매집했다.
이 기간 연기금은 신한지주(1930억원)를 필두로 삼성생명(1670억원), 한국전력(990억원, 하나금융지주(910억원), 삼성증권(720억원), 한국금융지주(360억원) 등을 담았다. 하지만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이후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이 실망 매물을 출회하며 연기금 역시 관련 종목들 비중을 줄인 것으로 분석된다.
포트폴리오는 다양해졌다. 이달 들어 연기금은 올해 상장한 HD현대마린솔루션(1700억원)을 가장 많이 사들였다. 상장 첫날 연기금은 1397억원어치 사들이며 투자자 중 순매수 1위를 기록했다. 연기금이 하루 만에 1000억원 이상 개별 종목을 순매수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란 평가도 나왔다.
이어 HD현대중공업(530억원), 에이피알(490억원), LG이노텍(480억원), 포스코홀딩스(380억원), 엔씨소프트(360억원), 한화솔루션(330억원), LG생활건강(320억원) 등 저PBR에서 벗어나 실적주와 낙폭과대주를 주로 매집했다.
연기금이 담은 에이피알, LG생활건강 등 화장품주는 올 1분기 깜짝 실적을 냈다. 증권업계는 해당 기업들이 중국 외 북미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면서 실적 상승세를 이어갈 것으로 봤다.
LG이노텍과 엔씨소프트는 최근 30%대까지 하락한 낙폭과대주로 이후 반등을 노리며 매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상현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LG이노텍은 현재 주가가 역사적 최하단 수준까지 내려와 시장의 우려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판단”이라며 “북미 고객사가 차별화된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을 선보인다면 하반기 판매량 반등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으로 대표되는 연기금은 1000조원 이상을 운용한다. 금융투자업계는 연기금의 매수 시점을 저평가 신호로 읽을 수 있다면서 증권가 하반기 전망과도 일치한다고 말한다. 증권가 역시 하반기 금리 인하 이후 게임, 기술 등 낙폭이 심했던 업종으로 투심이 몰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하반기에는 실질적인 금리 인하 사이클 시작과 미국 경기 저점 통과, 중국 경기 부양책 효과 등에 힘입어 증시에 강한 상승 흐름이 전개될 것”이라며 “한국 증시도 반도체 업황 개선과 성장주 반등이 가세해 탄력적인 상승을 이어갈 전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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