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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디폴트옵션은 이미 논의가 끝난 제도다. 이제 퇴직연금 기금형 운용의 확장을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5월 초 서울 광화문 개인사무실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난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은 한국 퇴직연금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방안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낮은 운용 수익률은 한국 퇴직연금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이는 같은 돈을 부었어도 은퇴 시 손에 쥐는 돈이 다른 퇴직연금 선진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김 고문은 한국도 제도만 잘 갖추면 충분히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바라본다.
한국의 평범한 직장인도 미국과 호주의 사례처럼 퇴직연금으로만 은퇴 시 10억 원을 손에 쥐는 ‘연금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녹록치 않은 한국의 퇴직연금시장 현실을 잘 이해하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전략을 짜야 한다.
◆ 야심차게 도입한 ‘디폴트옵션’이 답이 될 수 없는 이유
보건복지부는 낮은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을 극복하기 위해 시범기간을 거쳐 2023년 7월 본격적으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 제도를 도입했다.
디폴트(default)는 응용 프로그램에서 사용자가 특별히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시스템이 자동으로 적용하는 초기 값을 뜻한다.
디폴트옵션이 퇴직연금시장 성장의 핵심요인으로 작용한 미국 사례를 보면 퇴직연금 가입부터 운용까지 근로자는 아무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가입을 원하지 않을 때나 투자상품으로 운용을 원하지 않을 때만 행동에 나서면 된다.
김 고문은 “미국은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부터 디폴트로 설정하면서 퇴직연금 가입률이 단기간에 크게 올랐다”며 “자연스럽게 타깃데이터펀드(TDF) 같은 전문기관이 운용하는 최적화한 자산배분 모형으로 자금이 유입되면서 수익률이 크게 개선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 도입된 디폴트옵션은 미국의 제도에서 이름만 따왔을 뿐 효용성이 떨어지는 반쪽짜리 제도라는 비판을 받는다.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사전지정운용제도’라는 이름 풀이에서 나타나듯 ‘개인이 사전에 운용 상품을 지정하는 제도’다. 이미 상품이 지정되는 진정한 의미의 ‘디폴트’가 아니다.
김 고문은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미국, 호주처럼 개인의 선택 없이 초기 값이 설정돼 있는 게 아니다”며 “실질적으로 개인이 상품을 직접 다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냥 각 운용사의 대표상품을 소개받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게다가 한국은 퇴직연금 운용은 안전해야 한다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나라다.
통계청의 2023년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88%가 금융자산 투자 때 예금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은 8.7%, 개인연금은 1.5% 수준이다.
이렇다보니 디폴트옵션 안에서도 기존 퇴직연금 운용과 마찬가지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김 고문은 “투자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높은 2030 등 젊은 세대도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을 보면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자금이 쏠리고 있다”며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사람은 단기 결과에 반응하고 안정을 찾는 데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퇴직연금 적립금의 운용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다른 방안은 없을까?
◆ 퇴직연금 선진국의 ‘기금형 제도’ 성과 주목해야
김 고문은 “장기적 관점에서 퇴직연금을 기금으로 설립해 운용하는 기금형 제도의 확장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제안했다.
기금형 제도는 퇴직연금을 특정 연금 사업자에게 맡기는 것이 아닌 전문 위탁기관과 계약을 맺고 운용하는 방식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 최고 수준의 수익률과 규모를 자랑하는 호주가 바로 확정기여형(DC) 형태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대표적 국가다.
호주 퇴직연금시장은 산업형 기금, 소매형 기금, 기업형 기금, 공적 기금, 자기관리 기금 등 기금들이 이끌어간다.
이 기금들은 당국의 관리 아래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집합운용에 따른 규모의 경제로 운용보수는 낮추고 수익률은 더 높이는 효과를 보고 있다.
김 고문은 “연금 같은 생애 자산관리는 철저하게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며 “네덜란드처럼 퇴직연금을 기금형 제도인 ‘콜렉티브 DC’로 운영하고 더 나아가 퇴직연금 인출방식으로 종신연금을 의무화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도 퇴직연금 기금형제도의 시범작업 성격의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 ‘푸른씨앗’이 주인공이다.
푸른씨앗은 2022년 9월 도입된 국내 유일한 기금형 제도다. 사업주가 납입하는 부담금으로 공동의 기금을 조성, 운영해 근로자에게 퇴직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푸른씨앗은 현재 사업장 1만6천여 곳에서 근로자 8만8천 명이 가입했다. 2023년 기금 수익률은 6.97%로 결코 낮지 않다. 적립금 누적수입도 약 6천억 원에 이른다.
현행법에서는 30인 이하 중소기업만 푸른씨앗에 가입할 수 있다.
김 고문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는 집합운용으로 국민연금이나 공제회와 같은 구조다”며 “이 제도가 성공해 나중에 50인, 100인 사업장으로 점차 확장할 수 있다면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이밖에도 한국 퇴직연금 투자시장 활성화를 위해 자본시장 자체의 밸류업, 퇴직연금 포트폴리오 자산배분 전략 변화 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국내 주식시장 구조를 개선하고 개인은 퇴직연금 투자처 다변화 차원에서 글로벌 증시 투자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고문은 “통계를 보면 한국 증시는 최근 10년 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두 자릿수인 미국과 비교해 크게 낮다”며 해외투자로 눈을 넓히는 것도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고문은 1962년생으로 경남 마산고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장기신용은행, 장은경제연구소, 국민은행 경제경영연구소, 한국채권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지냈다.
2000년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운용본부장 겸 공동대표로 미래에셋그룹에 합류한 뒤 미래에셋캐피탈 대표, 미래에셋자산운용 경영관리부문 대표 등을 거친 뒤 미래에셋은퇴연구 2대 소장,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으로 일하면서 3월 저서 ’60년대생이 온다’를 출간하고 다양한 경제방송에 출연하는 등 여러 기고와 방송활동 등을 통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박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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