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가 쌍용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경기 판교에 KT 신사옥을 지은 쌍용건설이 물가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자 “더 줄 돈이 없다”고 공언한 뒤 이를 법원의 판단에 맡긴 것이다. 쌍용건설이 맞소송을 예고하면서 발주처와 시공사 간 갈등은 소송전으로 치닫게 됐다.
이번 공사비 분쟁의 씨앗은 ‘물가변동 배제특약’이다. 다른 건설사들도 유사한 계약을 맺어온 만큼 KT와 쌍용건설 간 소송 결과가 건설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상당할 전망이다. 이렇다 할 선례가 없는 상황에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어서다. ▷관련기사: “공사비 이렇게나 올랐다고?”…’물가변동 배제특약’ 논란(2023년12월6일)
KT “물가 올라도 공사비 유지가 계약 조건”
쌍용건설은 지난 2020년 판교 제2테크노밸리 현장의 KT 신사옥 신축공사를 967억원에 수주했다. 이후 2022년 7월부터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다는 이유로 공사비 171억원 높여줄 것을 요청해왔다. 약 17.7%의 인상률이다.
KT는 물가변동에 따른 공사비 조정이 없다는 계약상 ‘물가변동 배제특약’을 근거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쌍용건설은 지난해 10월 국토교통부 건설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공사는 지난해 4월 마친 상태다.
그리고 이달 10일 KT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쌍용건설에 대한 채무부존재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KT는 공사비를 이미 모두 지급했으므로 추가 비용을 줄 의무가 없음을 법원으로부터 확인받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KT는 쌍용건설 요구대로 공사비를 미리 지급했고, 설계 변경에 따른 공사비 증액(45억5000만원) 요구도 들어줬으며, 공기연장(100일) 요청도 수용했다는 입장이다.
KT 관계자는 “쌍용건설은 계약상 근거 없이 추가 공사비 지급을 요구하며 시위를 진행하는 등 KT그룹의 이미지를 훼손해 왔다”며 “불필요한 논란을 해소하고 사안을 명확하게 해결하고자 법원의 정당한 판단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쌍용건설은 이 같은 KT의 대응에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10월 판교 사옥 집회 이후 ‘상생협력 하겠다’는 KT를 믿고 지난 3월 계획했던 광화문 본사 집회도 연기했다는 설명이다. 쌍용건설 관계자는 “KT 본사 집회는 물론 공사비 청구 소송도 제기할 것”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KT 고통분담해야” 요구에도…법적으론 쌍용 불리?
국토부에 따르면 공공공사는 국가계약법에 따라 3% 이상 물가변동이 있을 때 계약금액을 조정할 수 있다. 민간공사는 표준도급계약서를 채택한 경우에 한해 품목조정률 또는 지수조정률 방식으로 물가인상분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는 권고 사항일 뿐 실제로는 ‘물가변동 배제특약’에 따라 공사비가 고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조항이 건설사에 불리한 계약 상 ‘독소조항’이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국토부는 2022년 ‘무효가 될 수도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제5항 제1호 ‘계약체결 이후 설계변경, 경제상황의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계약금액의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않거나 그 부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경우’라면 그 부분을 무효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쌍용건설은 “KT가 대기업 발주처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부당특약조건’을 고집해 시공사와 하도급 업체에 피해가 발생했다”며 “시공사와 하도급사의 추가 비용으로 사옥을 신축한 것에 대해 KT는 발주사로서의 고통분담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건설 도급계약이 원칙적으로는 사인 간 계약이므로 지켜져야 한다는 법조계의 판단도 있다. 시공사가 주장하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이 타당한가를 두고도 이견이 존재한다.
김예림 법무법인 심목 대표변호사는 “코로나19가 공사비 상승에 어떤 인과관계를 미쳤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며 “우리나라도 아닌 외국의 전쟁,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노조 파업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올랐다 해서 추가로 공사비를 청구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정세의 박영구 변호사(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일반적으로 물가변동 배제특약이 있으면 시공사에 불리하다. 물가변동이 이례적이고 특별한 사정임을 주장해야 한다”며 “실제 공사현장에서 자재를 조달하는 비용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등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봤다.
증액 받아들여지면…’유사소송’ 쏟아질듯
KT가 ‘줄 돈이 없다’고 소송을 건 상황이라 쌍용건설은 ‘받을 돈이 있다’고 맞소송을 걸 예정이다. ‘채무부존재 확인의 소’에 대한 반소 개념으로 ‘공사대금 청구의 소’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같은 법원·재판부에서 함께 판단을 내린다.
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는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선 채무 여부를 판단할 뿐 돈을 주라는 판결까지 내리진 않는다”며 “줄 돈 없다는 쪽이 소송하는데 받을 돈 있다는 쪽이 반소하지 않으면 재판부가 볼 때 이상한 상황이 되므로 쌍용건설이 맞소송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결까지는 최소 5년 이상 소요되겠지만 1심 판결만 나와도 건설업계가 술렁일 전망이다. 중앙지법이 코로나19와 러-우 전쟁 등을 불가항력적 사유로 판단할 경우 마찬가지 상황에 놓인 다른 건설사들도 발주처에 공사대금을 청구할 수 있게 돼서다.
박영구 변호사는 “재판부가 ‘경제상황의 변동’이라는 계약사항이 아닌 다른 사정을 공사계약의 변경사유로 삼아 판단한다면 상당한 ‘리딩 케이스(선례가 되는 판결례)’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김광중 변호사는 “쌍용건설이 이긴다면 비슷한 계약조항을 적용한 다른 건설사들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해 공사대금을 더 받지 않으면 배임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소모적인 법적 다툼 대신에 발주처와 시공사가 한발씩 양보해 책임을 분담하는 대승적인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고려한 합리적인 판례가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조언도 이어졌다.
박철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공사에 적용되는 기준을 따라 물가상승률 3% 미만은 시공사가 감수하고, 이를 넘어서는 부분은 발주처에서 보전해주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발주처와 시공사 모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소모적인 싸움이 계속되므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중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공사비 상승뿐만 아니라 하락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박 연구위원은 “계약 당시보다 실제 공사비가 낮아질 경우 그동안은 시공사가 노력한 결과물로 인식했다”며 “전세계적으로 공급망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공사비 상승과 하락 시 바로 반영해 정산할 수 있는 합리적인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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