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 유럽 출장 마치고 귀국 “봄이 왔네요”
“반도체의 봄 온다” 기대감
세계는 지금 사활을 건 반도체 패권 전쟁…’춘래불사춘’ 속내 아니었으면
“봄이 왔네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언어는 놀랍다. 듣기에 따라,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곱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다르다. 2021년 5년4개월 만에 미국 출장을 다녀온 후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 것도 그렇다. 신기하게도 그의 발언 이후 글로벌 반도체 경기는 2022년 상반기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을 탔다. 그냥 툭 던지는 듯하지만, 이 회장의 말은 이러한 촌철살인의 의미들이 담겨 있어 듣는 재미가 있다.
“봄이 왔네요”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럽 출장의 성과를 묻기 위해 모인 기자들 앞에서 전후 설명도 없이 아주 태연하게,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봄’은 희망의 상징이다. 새로움과 기회의 메타포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주력 상품인 D램의 가격이 전고점을 회복하는 등 레거시 반도체 부문의 이윤이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가운데,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도 이윤 창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국가적으로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확대되고 있다. 통관 기준으로 반도체 수출은 1년 전보다 34.5% 증가했다. 주요 수출 품목 중에 가장 두드러진 상승세다.
이 회장의 ‘봄’이 메타포가 아니라 리얼리티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출장에서도 이 회장은 독일 오버코헨에 있는 반도체 및 광학 전문 기업 자이스 본사를 방문해 칼 람프레히트 최고경영자(CEO) 등 경영진과 만나 반도체 분야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자이스는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기술 관련 핵심 특허 2000개 이상을 보유했으며, 세계 1위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인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에 탑재되는 광학 시스템을 독점 공급하고 있다.
계절 바뀜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항상 담겨 있다. 1년 단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반복되지만 1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다시 원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전과 다른 상태로 계속 변화한다. 이런 의미로 보면 8일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이 발표한 ‘반도체 공급망의 새로운 회복 탄력성’보고서는 눈여겨볼 만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2032년 우리나라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19%의 생산비중을 차지, 대만을 제치고 중국(21%)에 이어 2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 2022년을 기준으로는 중국의 반도체 생산 비중이 24%로 가장 높고 대만이 18%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우리나라와 일본이 나란히 17%의 비중으로 공동 3위에 올랐다. 2032년 대만의 생산 비중은 17%로 예상됐다.
그러나 보고서는 대만과 한국이 양분하고 있던 최첨단 로직(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이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한국의 점유율은 2022년 31%에서 2032년 9%로 급락할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이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으로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대거 유치하면서 약 10년 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곁들여 해석하면 선문답 같은 이 회장의 ‘봄’은 다른 의미로 읽힌다. 현실 풍경은 봄을 즐길 만큼 한가롭지 않아 보여서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이 회장과 삼성에 국가적 차원의 도움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세계는 지금 사활을 건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도 반도체 산업에 인센티브와 기금을 동원해 전폭 지원에 나서고 있다. 1993년부터 30년간 세계 1위 메모리 솔루션 기업이란 타이틀을 지켜온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미래 30년을 위한 전략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K칩스법’으로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도 본회의 상정이 불투명하다. 당장 내년부터 반도체 기업 설비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반 토막이 나는 것을 고려하면 시급한 과제다.
마침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며 “우리는 반도체 제조 분야가 강하기 때문에 시간이 보조금이라는 생각으로 반도체 공장 등 건설 시 전력과 용수 같은 기반 시설이 속도감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사업 진행을 도와주려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속도다. 국가역량을 반도체 투자에 총동원하는 선진국에 맞서려면 우리 정부와 기업도 지금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혹시 이 회장도 “봄이 왔네요!”가 아닌 “봄이 왔네요…”를 말하려 했을까. 좋은 시절이 왔지만 처한 상황이나 마음이 아직 추운 겨울 같았을까. 이 회장의 “봄이 왔네요”가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의미는 아니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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