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러·한 관계는 상당히 악화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조건이 조성될 때 새로운 발전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집권 5기를 맞아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변동이 있을까. 스스로를 ‘낙관주의자’라 칭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신임 주한 러시아 대사는 한국과 러시아 관계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3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진행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러·우 전쟁 이후 악화한 한·러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문화 관광 등 민간 분야에서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2년 2월 러·우 전쟁 발발 후 한국은 서방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여러 방면의 교류가 끊어졌다. 지난 3월 러시아 당국은 한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구금하고, 한국에선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한국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며 양국 간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다만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가 지난 7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등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이어가고 있다.
우선 지노비예프 대사는 러시아가 북한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북·러 무기 거래 의혹을 부인한 그는 이날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에 지지를 표명하는 북한에 대해 “(북한과)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이상하다”고 했다.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는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러시아가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를 위반하고 있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러 관계가 경색된 부분이 있다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 등 ‘적성 행보’를 보이는 여타 서방 국가와는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러·한 관계 악화는 내부적 문제가 있어서 발생한 게 아니라 외부적 영향으로 발생했다”며 “최대 불신, 대치 단계에 접어들어 복원이 어려운 서방과 관계와 다르다”고 말했다.
소원해진 한·러 관계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한·미·일 동맹과 북·중·러 대결 구도가 굳어진 지금 외교·안보·통상 분야에서 변화를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지노비예프 대사는 다소 문턱이 낮은 ‘문화·관광·예술’ 분야부터 풀어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문화와 인문 분야에서 교류를 천천히 복원할 수 있다”며 “첫 발걸음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부연했다.
그는 문화·관광 분야 교류 활성화의 최우선 과제로 한-러 직통항공편 개통을 들었다. 현재 한국과 러시아 항공편은 중국 등 경유지를 거쳐야 해 왕래가 쉽지 않다. 따라서 “양국 국민 간 교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직통항공편 부재”라며 “이것부터 시작하면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하늘길을 여는 동시에 민간 영역에서 양국 간 문화·예술 분야를 활성화하자는 게 그의 의견이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지난 4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공연 취소에 대해 상당한 유감을 나타내며 문화교류에 대해 “정치화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3월 푸틴 대통령 최측근으로 불리는 무용수의 공연이 취소된 데 이어 4월에는 볼쇼이 발레단 공연 개최도 연달아 무산됐다. 그는 한국보다 더 관계가 악화한 일본에서도 얼마 전 러시아문화축제가 열렸다고 거론하며 러시아 문화 자체를 배척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이 외에 컴퓨터 게임 등 젊은 층이 선호하는 문화 협력 방안도 내놨다. 그는 지난 2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국제게임대회에 한국팀도 참여해 각국 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신흥국 모임 브릭스(BRICS) 산하 협력 기구 행사에 한국 청년들이 참여했다며, 청년층 위주 교류를 강화하자고 말했다.
끝으로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이 러시아 이슈를 접할 때 ‘균형 있는 시선’으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한국에서는 주로 서방 국가 언론이 전달한 내용을 중심으로 러시아 관련 현안을 접하고 있다며, 그러한 점이 아쉽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한국에서 한쪽이 아닌 다른 쪽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며 “서방 쪽 미디어 보도만 듣는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파악하기가 많이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노비예프 대사는 최근 국내에서 논의되는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참여’에 있어서도 한국 측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서방 사회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재건을 논의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언급했다. 그는 재건을 논하려면 전쟁이 종식돼야 한다는 점과, 우크라이나는 현실적으로 재건 사업에 대한 자금을 지원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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