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생기업 ‘낙인’ 불안…제도 밖 한계社 더 많다
부채‧자산 규모 따라 억대까지 예납
오너 경영권 상실 문제도 장애 요소
회생도 파산도 못한 채 기업방치까지
“채권자 소송 반복 등 사회비용 커져”
#.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지난해부터 법인 회생·파산에 관한 문의가 부쩍 늘었다. 하지만 자산 총액이 300억 원이 넘는 법인이 회생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5000만 원 상당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법률 자문에 다들 크게 놀란다. 또 법인 파산은 부채 총액 100억 원 이상일 경우 2000만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돼 금액을 무시할 수 없다. 회생과 파산 위기에 처한 회사들은 단기 자금 유동성이 예상과 달리 급격하게 경색되는 때가 많아 도산법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 절차를 진행하려고 하다가도 비용을 마련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포기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돈이 없어 궁지에 몰린 기업이 회생·파산을 하려 해도 돈이 없어 못하는 셈이다.
법조계에서는 제도권 통계 수치로 파악되는 법인 회생 및 파산 현황이 실제 위기의 아주 일부만을 드러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계에 처한 회사들이 회생이나 파산 등의 제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법무법인(유한) 지평 도산·구조조정팀장인 권순철 변호사는 1일 본지에 “돈이 없어서 회생이나 파산을 하겠다는데, 또 돈을 내야 하니 사실상 제도 이용에 장애가 있다”고 꼬집었다.
권 변호사는 “회생이나 파산을 고민하는 기업에게 가장 큰 문턱은 비용”이라면서 “부채나 자산 규모에 따라 법인회생 신청에 드는 돈을 예납해야 하는데, 적으면 몇 천만 원부터 많으면 억대까지 나올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응교 법무법인(유한) 바른 자산관리그룹 변호사 역시 비용 문제를 거론했다. 이 변호사는 “기업들이 적기에 회생 절차에 들어가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유동성 여력이 남아 있을 때 신청해야 회생절차 비용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있다”라고 강조했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공적자금 투입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이미 상당수 기업들에 들어간 공적자금 회수율이 낮다는 비판 여론이 커진 지 오래다.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국민 세금 부담이 큰 공적자금 직접 투입보단 처분자산이 아직 남아있는 기업들의 자체 재산을 구조조정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경영권 상실 문제 또한 큰 장애 요소다. 권 변호사는 “파산처럼 회사가 없어지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실상은 회생 역시 기존 오너가 회사를 계속 운영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된다”며 “채권자에게 채무를 변제하는 방편으로 주식을 발행해주면 채권자가 대주주가 되고 결과적으로 경영권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회사의 대표이사는 통상 회사 채무에 연대보증을 선다.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면 결국 개인의 책임재산으로 회사 빚을 변제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이런 위기 때 일부 대표는 자신의 책임재산을 배우자나 자녀 명의로 돌려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 한 기업의 대표이사는 파산 신청을 하기 6개월 전에 부동산 명의를 배우자에게 이전해 책임재산을 일탈시켰다가 파산관재인이 부인권을 행사하겠다고 통지하자 해당 부동산을 파산재단에 환원, 부인권 행사를 면하고 형사 고소 등을 피한 사례가 있다.
이 변호사는 “법인 회생이 어느 정도 진행되거나 조기 종결된 이후 대표이사의 회생을 신청하는 게 현재 실무”라며 “경영 위기 속에서 대표이사가 보증채무를 부담할 경우 개인 자산을 매각하거나 은닉하면 부인권 행사나 형사 처벌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부인권’은 파산관재인이 파산 선고 전에 행해진 파산채권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행위의 효력을 부인해 채무자의 일반 재산으로부터 일탈된 재산을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김시주 법무법인(유한) 충정 경영총괄 대표변호사는 “채권 회수가 잘 되지 않는 경우 채권자로서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파산·회생 절차를 활용해 채무자의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채무자를 향한 파산·회생 신청을 하고, 파산·회생 절차에 적극 참여해 자신의 채권을 행사하는 것이 최대한 채권 회수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법인 회생·파산은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히면서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회생도 파산도 하지 못한 채 기업을 방치하는 일이 생기는 배경이다. 방치된 기업은 일정 시간이 흐르면 상법에 따라 ‘기업 해산’ 상태로 간주된다. 제 기능을 잃은 회사가 제 때에 정리되지 못하고 적체될 경우 채권자로부터의 소송이 반복되는 등 사회적 비용이 커질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황성민 서울회생법원 공보판사는 “파산을 하지 않으면 실제 영업 중이 아님에도 채권자로부터 소송이 들어올 수 있다”면서 “파산 제도를 활용하면 채권자와의 문제를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고 근로자 임금 체불에 대한 처벌까지 면제될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법원은 보다 충실한 심리를 위해 관련 조직과 인원을 확충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수원·부산 3곳에만 있는 회생법원을 광주·대구 두 지역에 추가해 전국 5대 권역에 회생법원을 확대 설치하는 방안이다. 결국은 법원 조직 개편과 연결되는 문제여서 국회 협조가 필수다. 현재 국회에는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구역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 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용어설명] 부인권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이익을 배분하기 위해 파산관재인이 채무자를 상대로 행사하는 권리. 채무자가 파산·회생 절차를 개시하기 전에 재산을 미리 팔아 처분 대상에서 누락시키거나, 특정 채권자에게만 편파적으로 먼저 변제하는 등의 상황에서 파산관재인은 채무자회생법에 따라 이 같은 사해행위(채무자가 채권자를 해하는 행위)의 효력을 부인할 수 있다. 부인권을 행사하면 이미 처분하거나 변제한 자산이라도 다시 법인 명의로 환수돼 원상회복된다.
◇ 법조팀 = 박일경 기자 ekpark@‧박꽃 기자 pgot@‧김이현 기자 spes@‧전아현 기자 ca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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