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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로] ‘숙성의 시간’ 거친 일본의 밸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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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공들여 추진…기업가치 제고
우리는 관치속에 흉내내기 급급해
땜질식 아닌 ‘숙성의 가치’ 깨닫길


지난해 11월 정식 개장한 일본 최고의 마천루 모리JP타워, 높이 330m로 2014년 세워진 오사카의 아베노하루카스(300m)를 제쳤다. 일본에서 재개발은 토지주의 3분의 2가 동의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모리빌딩은 90%의 동의를 받으려고 공을 들였다. 1989년 재개발조합 설립 당시 64세였던 재개발 추진 위원장은 지금껏 바뀌지 않았고 98세가 되어 준공식에 참석했다. 재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모리 미노루 회장이 무릎을 꿇고 “한 분이라도 재개발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고 호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하나의 마을로 완성되고 다같이 돕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정성은 34년을 관통한 일념이었다. 이전 주택과 새로 개발한 주택을 일대일로 맞교환하게 하는 ‘시가지 재개발법’은 대자본의 공세로부터 원주민을 보호했다. 장기간 진행되는 도시개발이 예상치 못한 규제와 금융리스크로 중단되지 않도록 국가전략특구 프로젝트로 국가가 전폭 지원했다. 동의를 받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착공에서 완공까지는 6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숙성의 시간이 있었기에 빠른 실행이 가능했다.

일본의 60~64세 고령자 취업률은 2000년 51%에서 2020년 71%로 치솟았다. 일본은 한국보다 18년 이른 1998년에 법정 정년을 60세로 연장했다. 2000년에는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개정해 기업이 65세까지 고용을 유지하도록 유도했다. 2013년부터는 3년마다 1세씩 정년을 늘리는 ‘대상자 확대조치’를 통해 정년 연장을 희망하는 고령 근로자를 65세까지 고용할 의무를 기업에 부여했다. 25년에 걸친 숙성의 기간 동안 일본 기업의 99%는 65세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고령자 취업률이 높아진 까닭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2016년 법정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일률적으로 확대하면서 3년의 유예기간을 뒀을 뿐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 법정 정년 연장만 고집하는 노동계와 임금부담을 덜어 줄 ‘직무급제’ 도입을 주장하는 경영계가 대립하면서 논의는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고령화 대책의 필수요건인 장기요양기관 근무 간호사는 인구 100명당 0.04명에 불과해 준비가 부족하다는 일본(1.1명)과 27.5배나 차이가 난다.

올해 한국의 최저임금은 9860원, 반면 일본의 지난해 최저임금은 8953원(4월 9일 환율 기준)이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47개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한국보다 최저임금이 높은 곳은 도쿄와 가나자와 두 곳밖에 없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외국인력이라면 당연히 임금이 높은 한국으로 와야 한다. 그런데도 일본에 기능실습생으로 입국하는 베트남 인력은 매년 8만~9만 명에 이른다. 반면 지난해 한국에 입국한 베트남 인력은 1만 901명에 불과하다. 일본은 기업이 원하면 자유롭게 외국인력을 채용할 수 있는데 한국은 외국인 근로자 도입 쿼터에 따라 매년 입국자 수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비숙련 노동자의 체류요건을 완화하는 고용체제 개정안은 2년 이상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가 곧 폐기될 판이다. 일본이 2019년 ‘재류관리청’을 세워 이민정책을 발 빠르게 수립해 시행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이민청은 언제 설립된다는 것인지.

일본의 증시는 지난 2월 22일 버블붕괴 후 3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기업의 실적이 개선된 데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작업이 효과를 거둔 때문이다. 일본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출발점은 2014년 발표된 ‘이토 보고서’다. ‘지속적 성장을 위한 경쟁력과 인센티브 – 기업과 투자자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 프로젝트’라는 긴 이름이 공식 명칭이다. 학계와 금융, 재계가 중심이 되어 1년에 걸쳐 논의를 했고 일본 정부는 지원 역할에 충실했다. 차등 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도입됐고 이를 무기로 자사주 소각, 배당확대 등이 추진될 수 있었다.

반면 한국 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응할 수단이 사실상 전무해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확대 등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영권 승계를 바라는 대주주의 입장에서는 주가부양보다 계열사 확대를 통한 수익확대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20년이 넘는 숙성의 시간을 가진 일본 증시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효과를 보자 우리 정부도 이를 벤치마킹했다. 기관투자가들에게 밸류업 우수기업에 투자를 늘려달라 하고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기업에는 법인세 감면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주주에게도 세감면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상속세율에 대한 대책은 없고 통신료, 전기료, 은행 금리, 수수료 등 민간의 영역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관치와 규제는 개선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30년 숙성된 와인에 1년짜리가 맛으로 도전하는 격이다.

10년이 넘게, 길게는 30년에 걸친 숙성의 시간을 가진 것이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이다. 빠른 실행은 이런 숙성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드라마틱한 도심 재개발, 고령자 및 여성 취업의 증가, 발 빠른 이민 대책, 출생률 상승, 기업 실적의 개선, 증시의 활황 등 일본의 경제, 사회적 밸류업이 부럽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숙성의 시간이라 하겠다.

이투데이
content@www.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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