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작가이자 거친 한국 사회에 ‘톨레랑스(관용)’를 알린 지식인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생을 마감했다. 홍세화 은행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과 말들은 세상에 남았다.
홍세화 은행장은 지난해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최근까지 투병 생활을 해오다, 18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뒤, 홍세화는 무역회사에 일하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고 20년간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됐다.
“‘꼬레’ 출신 망명자인 나는 ‘꼬레’를 여행할 수 없다. 그러나 내 몸은 그리고 내 마음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꼬레’는 나의 땅이며 우리들이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으며 조국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서문 중
그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라는 책을 통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책은 그가 망명 시절에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한 경험을 담은 책이다. 그는 책을 통해 프랑스어로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 개념을 소개하면서, 획일화되고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진지한 성찰을 요구했다. 그가 소개한 똘레랑스는 다름을 존중하라는 것이고 그 다름을 이유로 차별, 억압, 배제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이외에도 그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1999)’,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2002)’, ‘생각의 좌표(2009)’, ‘결: 거칢에 대하여(2020)’ 등을 집필하고 독자들과 소통해 왔다.
홍세화는 시대의 물음에 행동과 실천으로 답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았다. 1999년 귀국 후, 그는 언론인으로 2001년 2월부터 한겨레 신문사에서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2013년에는 배제당한 자들의 말을 통한 저항을 담아내고자 인문주의 정치비평집 ‘말과 활’ 창간호를 출간하고, 발행인을 맡아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목소리 냈다.
또, 정당인으로 홍세화는 2012년 진보신당 공동 대표를 역임하며 한국 사회 진보를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노동당 후원회장과 고문을 맡아 일했다.
홍세화는 인권을 위해 힘써온 사회운동가다. 그는 가난한 형편으로 벌금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서 노역해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 미성년자 등을 위해 시민 기부로 재원을 마련해, 무담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장발장 은행을 2015년에 설립했다.
고인의 빈소는 신촌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부인 박만선 씨와 자녀 수현·용빈 씨가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킨다.
양아라 에디터 / ara.yang@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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