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늘 그 이상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16일 국무회의 발언 생중계는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이벤트였다.
범야권의 기록적 압승으로 끝난 4·10 총선의 결과를 두고 모두가 대통령을 원인으로 가리키는데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조차 없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논란이 최고조에 오른 지난 2월 7일에 한 한국방송(KBS)과의 대담도, 전공의 파업 장기화 속 가진 4월 1일 의대 증원 대국민 담화도 그랬다. 사람이 쉽게 변하겠냐마는 ‘이 정도는 하겠지’라는 보수층의 예상마저 번번이 깬다.
카메라가 꺼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비공개로 “저부터 잘못”이라고 했다는 대통령실 ‘마사지’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17일 아침엔 일부 언론에서 야권 인사 총리·비서실장 기용설이 나왔다. ‘물타기’ 내지 대통령실 내 의견 대립에서 나온 언론플레이가 아니라면, 전날 발언부터 달랐어야 했다.
어느 정권이나 국민이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는 서운함은 갖기 마련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차원이 다르다. 장황한 발언 속엔 서운함을 넘어 ‘몰라주는 국민이 문제’라는 시각이 누가 봐도 명확하다. 하긴 논란의 중심에 있던 김건희 여사를 넉 달이나 두문불출시켰으니, 대통령 부부로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김 여사는 5일 혼자 용산 근처에서 사전투표를 했다. 에스엔에스에 말이 나돌자 뒤늦게 대통령실이 사실만 확인해 줬다. 대통령 부부가 임기 중 치르는 선거에서 따로 투표하는, 그것도 한 명은 몰래 투표하는 극히 이례적인 모습이 외려 김 여사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법정 제재가 두려운 방송 패널들은 ‘김건희 특검법’을 ‘도이치 특검법’이나 ‘김건희 여사 특검법’이라 해야 한다. 민영화된 와이티엔(YTN) 수장으로 취임한 김백 사장의 첫 과제는 김 여사에 대한 과거 보도 등에 대한 사과였다. 14일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문화방송(MBC) ‘스트레이트’의 ‘세계가 주목한 ‘디올 스캔들’ 사라진 퍼스트레이디’ 방송에 법정 제재를 전제로 한 의견 진술 결정을 내렸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한 위원은 “‘백’이라고 하지만 명품 파우치이기 때문에 명칭부터 정확성을 벗어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총선 결과와 의미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지만, 난 국민들이 권위주의와 ‘반동의 정치’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라 생각한다. 3월과 4월 각각 나온 스웨덴의 연구소 두 곳의 발표는 시사적이다.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연례보고서는 한국을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하는 국가”라고 밝혔다. 또 한국의 언론 자유 위축을 지적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 침해는 가혹한 독재국가들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국제민주주의와 선거지원연구소’(IDEA)가 19개국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한 ‘민주주의 인식’ 보고서는 의회나 선거를 무시하는 비민주적이고 강한 지도자를 선호하는 여론이 각국에 상당히 퍼졌다고 진단했는데, 한국은 유독 이에 대한 반대가 가장 강한 국가(반대 의견 73%)였다. ‘촛불’을 경험한 우리 사회의 도드라진 양상 아닐까. 한국 역시 ‘진영 대결’과 ‘정치 혐오’ 현상이 커지지만, 국민들이 독재로 향하는 독선과 아집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사를 ‘심판 선거’로 드러냈다. 야당 또한 진정 두려워해야 할 지점이다.
윤 대통령의 권위주의와 독선, 불통의 국정 스타일 정점에 김 여사 문제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가족 수사를 받아들였던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그는 ‘김건희 특검법’은 숙고의 시늉도 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2부속실 설치 가능성은 케이비에스 대담에서 대통령이 스스로 치워버렸다. 김경율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의 ‘마리 앙투아네트’ 발언 이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재해 현장에서 90도 허리 숙여 인사했던 건 이번 총선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였다. 아내를 지키려 대통령직을 수행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이 적잖게 됐다.
이제 조국혁신당이 예고한 ‘김건희 종합 특검법’에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뿐 아니라 양평 고속도로, 명품 가방 의혹까지 더해졌다. 설사 민생에서 협치를 한다 해도, 국민의 심판 뜻을 분명히 확인한 야당이 김 여사 문제까지 타협할 가능성은 적다. 당장은 채아무개 상병 특검이 쟁점이지만, 5월 말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김 여사는 다시 중심에 설 것이다.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해도 이번엔 국회 재의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어려울수록 정도를 갈 수밖에 없다. 김 여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으로 사죄하고 스스로 수사를 받겠다고 나서는 것뿐이다. 그다음은 국민의 평가와 법적 판단을 기다리시라. 대부분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예상할 때일수록,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시라.
한겨레 김영희 편집인 /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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