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취임하자마자 그간의 여권 비판적 보도들이 불공정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한 박민 KBS 사장의 행보가 시나리오처럼 담긴 문건이 공개됐다. 박 사장은 전임 사장이 해임되기도 전부터 ‘윤석열 정권 낙하산’으로 거론됐다는 점에서 그가 이런 문건을 어떻게 받았고 또 따랐는지 규명하라는 요구가 높아질 전망이다.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31일 <‘독재화’하는 한국-공영방송과 ‘신보도지침’> 편에서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제목의 KBS 대외비 문건을 보도했다. 스트레이트는 이 문건을 두고 “박 사장이 내정된 지난해 10월쯤 박 사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기별로 해야 할 일도 제시했다”며 “먼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인사를 통해 조직을 장악하고,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에 나서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건을 제보한 KBS 직원은 “고위급 간부 일부가 업무 참고용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건”이라고 했다.
“대국민 담화(사과)”와 “인사를 통해 조직 장악” 등 내용의 문건은 지난해 11월 취임 직후 박 사장의 행보와 같은 수순을 제시하고 있다. 박 사장이 대대적 인사에 속도를 내면서도 노사 단체협약 등에 명시된 국장 임명동의제 대상(통합뉴스룸국장, 시사제작국장, 시사교양1·2국장, 라디오제작국장) 인사는 늦춘 끝에 임명동의제 없이 강행했던 것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해당 문건은 “임명동의 대상인 보도국장 등 5명은 사장 의지대로 임명하되, 임명동의를 받지 못할 경우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발령을 강행하거나 선임부장으로 발령 내고 직무대행 체제를 유지하는 것도 고려할만”하다며 “이번 단체교섭은 주요 실국장에 대한 임명동의제를 비롯한 독소조항들을 고감하게 폐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문건은 2010년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이 만들었던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스트레이트는 “정상화라는 말이 똑같이 등장하고, 노영방송 단절과 척결, 우파 중심 인선과 좌편향 인물 퇴출, 단체협약 해지, 그리고 공영방송의 민영화까지. 2017년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이끈 국정원 수사팀은 국정원의 MBC 장악 문건이 ‘모두 체계적, 순차적으로 이행됐다’고 결론내렸다”고 짚었다.
이어 “검찰 조사를 받은 국정원 직원들은 문건의 배후로 청와대 홍보수석실을 지목했다. 당시 홍보수석은 이동관씨였다. 하지만 이씨는 참고인 조사도 받은 적 없다며 무관하다고 주장했다”면서 “그리고 13년 뒤 이동관씨는 윤석열 정부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다시 등장했다”고 부연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본인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처리를 앞두고 사의를 밝힌 바 있다.
KBS 측은 31일 현재까지 이 문건에 대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