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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차세대 전투기의 제3국 수출 길을 열면서 반세기 넘게 유지해온 ‘평화헌법’ 경로에서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일본 헌법 9조는 전쟁 포기 및 전력·교전권 부인을 명기하고 있으며 국제분쟁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해왔다.
26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 각의(국무회의)에서 영국·이탈리아와 공동 개발·생산하는 차세대 전투기의 제3국 수출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와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방위 장비 이전 3원칙’ 운용 지침을 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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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 지침 개정으로 다른 나라와 함께 개발한 완성품 무기의 제3국 수출을 허용한다는 항목이 신설됐으며 대상으로 차세대 전투기를 명시했다. 차세대 전투기 수출 대상국은 일본과 방위 장비·기술 이전 협정을 맺은 국가로 한정하고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나라는 제외한다. 일본과 해당 협정을 체결한 국가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15개국이다. 일본 정부는 전투기를 수출할 때마다 안건별로 국무회의를 열어 허용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일본·영국·이탈리아 등 3국은 일본 항공자위대 F-2 전투기와 유럽 유로파이터의 후속 모델이 될 차세대 전투기를 2035년까지 함께 개발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패트리엇 완성품을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라이선스 무기 완제품 수출 금지 규정을 완화했고 이번에 살상 능력이 한층 높아진 차세대 전투기의 제3국 수출 제한을 푼 셈이다. 주요 언론들은 이번 조치를 놓고 “일본 안전보장 정책의 대전환”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는 세계 주요국들이 경쟁적으로 방위산업 육성과 공동 개발에 나서는 만큼 자국 안보와 방위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기하라 미노루 방위상은 이날 기자단과 만나 “우리나라의 안보 환경에 걸맞은 전투기 구현을 목표로 영국·이탈리아와 협의해나가겠다”며 “엄격한 결정 과정을 거쳐 평화 국가로서의 기본 이념을 계속 견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일본의 행보를 놓고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 때부터 평화헌법 9조 개정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만큼 ‘전쟁 가능한 보통 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에 근거해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해오다가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때인 2014년 방위 장비 이전 3원칙을 마련해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제한된 용도에서 수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방위 장비 이전 3원칙과 운용 지침을 개정, 미국 기업의 특허를 사용해 일본에서 생산한 패트리엇 미사일 완제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이번 개정에서도 ‘전투 중인 나라에는 수출하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항공 전문가인 아오키 겐지 씨는 “수출 후 전투에 사용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며 “일단 전투기를 팔고 나면 어쩔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일 가자 공습에 투입 중인 전투기 F35는 네덜란드가 정비와 부품 공급을 맡고 있다. 네덜란드 시민단체가 수출을 금지하라며 정부를 고소한 상태지만, 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국가 간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게 아오키씨의 설명이다. 교도통신도 “차세대 전투기 제3국 수출 허용에 국회가 관여할 제도가 없어 정부에 수출과 관련된 설명을 요구하는 견해가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차세대 전투기 수출 문제에 대해 찬반 의견은 팽팽하게 갈렸다. 아사히신문 3월 여론조사에서 반대(45%)가 찬성(40%)을 웃돌았고 마이니치신문 조사에서는 수출국을 한정하면 찬성(47%)이 반대(35%)보다 많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는 찬성과 반대가 각각 45%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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