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의사와 정부의 갈등 속에서 숨겨진 책임 주체가 있는데 병원장들이다. 의사들이 의료 현장에 나오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아무런 조치하지 않은 채, 피해는 안 보려 노동자와 환자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있다. 의사와 정부도 마찬가지지만, 병원장도 자기 역할을 이제 해야 한다.”(이상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건강과대안 책임연구위원)
병원들이 의사 파업에 따른 금전 손실을 피하려 간호사들에 무급휴가를 강요하거나 업무 범위를 강제로 넓히고, 업무를 무리하게 재배치하는 등 불법 상황을 만든다는 현장 증언이 나왔다. 정부가 공공의료 역할을 축소하면서 의사에게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는 지역 필수의료 공백을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21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사인력 증원, 이렇게는 안된다’를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의사파업에 따른 의료현장 실태를 밝혔다. 전날인 20일 정부는 늘어난 의과대학 입학정원 2000명의 대학별 배분안을 발표했다.
100여개 직역 보건의료시설 노동자가 속한 의료연대본부는 전국 10개 대학병원과 의료원을 조사한 결과 ‘비상경영에 따른 인력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병원측이 각종 불법·탈법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강원대병원과 충북대병원, 제주대병원, 대구가톨릭대병원, 동산의료원, 서울대병원, 경북대병원, 동아대병원 등이다.
병원들은 의사 부족을 이유로 환자를 받지 않고 각 최대 9개 병동을 폐쇄하거나 통합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일하던 간호사들은 무급휴가를 보내거나 타 병동으로 강제 배치하고 있다. 근로기준법(46조 휴업수당)은 회사의 사유로 휴업할 경우 임금의 70% 이상을 지급하도록 한다. 한 병동당 일반적으로 20명의 간호사들이 근무한다고 보면, 조사된 10개 병원의 피해 간호사는 600여명으로 집계됐다.
박경득 의료연대본부장은 “서울대병원은 단체협약에 따라 100%를 줘야 한다”며 “그러나 병원들은 이 돈 아껴보자고 무급휴가 또는 배치 전환 중에 선택하라고 종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대병원은 간호부 근무조별 인원수를 줄이지 않기로 단체협약을 두고 있지만 병원이 병상수와 함께 조별 인원수도 줄였다. 언론 주목을 더 받지 못하는 다른 병원 노동자도 생계 곤란을 겪고 있다. 간병노동자 조합원 1000명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은 월 소득이 42% 가량 줄어들었다고 한다.
병원 방침은 환자 생명에도 위험을 전가하는 실정이다. 병원 측은 무급휴가나 다음달 휴일(오프)를 당겨쓰는 ‘마이너스 오프’를 거부하는 간호사들에는 타 병동(타 과)에 재배치하고 있다. 김동아 의료연대본부 정책부장은 “간호사가 장비 모니터, 기계 작동 부분이 숙련되지 않고 바로 현장에서 환자를 보려면 의료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윤 정책위원은 “의료업무는 숙련성을 필요로 하고, 내과와 외과는 쓰는 은어와 준말 자체가 다르고, 약 단위도 다르른데 갑자기 병동을 바꿔 투입한다? 용어부터 못 알아들을 것”이라고 했다.
PA(진료보조) 간호사를 불법으로 규정했던 정부와 언론이 태세를 전환해 간호사에게 의사 업무를 전가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울대병원에선 신규 간호사에게 업무를 전가하고 간호사가 법적 문제로부터 보호되는지 물으면 부서장이 ‘병원 돌아가는 상황 모르냐’고 묻는 사례도 접수됐다.
간호사인 정유지 강원대병원분회 사무장은 “2018년 PA 진료지원 간호사들은 불법행위자로 낙인이 찍힌 채 보건소 및 경찰 조사를 받고 많은 언론에 가십거리가 됐다”며 “그때 복지부는 강원대학교 병원 PA간호사 불법행위를 엄벌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명확한 해결 방안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박경득 본부장은 “한국 PA는 의사 부족 문제로 만들어졌는데, 이때다 싶어 시범사업에 나서면서 가짜 의료개혁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의사 증원이 꼭 필요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지금 방식으로는 시민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상윤 정책위원은 정부의 의대증원안을 두고 “방향이 틀린 물길을 바꾸지 않고 물을 더 넣겠다”고 하는 모양에 빗댓다. 공중보건장학제도나 높은 연봉 등 경제적 유인 정책을 써도 의사가 지역 필수의료에 모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가 실패한 정책을 재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적극 의지와 실력을 행사해 (지역 필수과에 의사를 의무배치해) 성과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경득 본부장은 “윤석열 정부가 증원하겠다는 의사 인력도 ‘우리는 공공재가 아니다, 의사면허 내돈내산이다, 내가 내 돈 내고 면허 취득했다’는 거지 않나. 민간이든 공공이든 어디든 강제하지 않는 증원을 정부는 얘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본부장은 “공공병원 건립을 취소하고 있는 공공병원도 지원 안 하면서 도대체 (늘어난) 의사들이 지역 어디서 일할 수 있느냐”며 “우리의 요구는 명확하다. 공공병원 설립과 확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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