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셀린 송 감독 “영화를 만들며 나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
전 세계 유수의 시상식을 휩쓸고 있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연출을 맡은 셀린 송 감독의 이력은 다소 특별하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넘버 3′(1997년) ‘세기말'(1999년) 등을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지만, 커리어의 시작은 ‘연극’이었다. 10년 넘게 뉴욕에서 극작가로 활동했고, ‘패스트 라이브즈’로 첫 연출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어릴 때 캐나다로 이주해 성장한 송 감독은 한국과 캐나다 그리고 미국을 오가면서 쌓은 경험과 정서를 ‘패스트 라이브즈’에 담았다. 본인의 미국인 남편과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내용을 구상했고, ‘인연’이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극에 녹였다.
그 결과 3월11일(한국시간) 열리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각본상, 작품상 후보에 올라 크리스토퍼 놀란,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세계적인 거장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셀린 송 감독은 “영화 연출은 물론 영화계에 발을 내딛는 것도 처음이다. 시상식도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부담은 없다고 밝혔다.
● 영화의 빌런? 나영 남편 아닌 “’24년’과 ‘태평양’”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끊어질 듯 이어져온 둘의 인연을 돌아오는 이틀간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3월6일 개봉한다.
셀린 송 감독은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해 “영화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서 “영화의 빌런은 24년이라는 시간과 태평양이다. 나영과 해성은 시간과 장소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영이 사는 뉴욕, 해성이 사는 서울이 얼마나 다른 지가 중요했어요. 냄새나 색깔을 시각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12살의 나와 12살이 아닌 내가 공존하는 모순 또한 그려야 했죠. 그래서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장소는 나영과 해성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이었다.
12살의 나영과 해성이 헤어진 골목, 해성이 친구들과 함께 고기와 소주를 먹는 식당, 나영과 해성이 뉴욕에서 처음 만나는 회전목마가 있는 공원, 두 사람이 이틀간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 길거리 등 셀린 송 감독은 “특별한데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장소가 필요했다”고 이야기했다.
송 감독은 “파리에 사는 사람에게 ‘당신의 파리’를 물어봤을 때 에펠탑을 대답하지 않는 것처럼 그곳에 사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으면서도 아름답고 소중한 곳이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 “이번 생에서도 ‘패스트 라이브즈’가 있어”
영화의 제목인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전생’을 의미하지만, 현재의 삶에서 ‘지나간 삶’이란 뜻도 지닌다.
셀린 송 감독은 “우리 영화는 인연에 대하 이야기이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도 이 영화의 주된 주제라고 생각했다”면서 “이번 생에서도 패스트 라이브즈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이민을 간 나영에게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의 삶일 것”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갈 수 있잖아요. 그리고 부산에 살던 시절을 전생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다중우주나 판타지를 얘기하고자 한 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시공간을 지나가면서 인생을 살고 있잖아요. 평범한 삶에서도 신기하거나 특별한 순간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24년간 이어진 나영과 해성의 관계를 통해 지나간 삶부터 이번 생, 다음 생까지 이어질 인연에 대해 말하며 복잡 미묘한 인연의 감정을 곱씹게 만든다. 송 감독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걸 느끼는지에 따라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인연이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작은 관계에도 깊이를 주는 단어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깊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파워풀한 단어라고 느껴져요. 한국사람들은 인연의 개념을 알지만, 외국인들은 잘 모르거든요. 개념을 몰랐을 뿐 느껴보기는 했죠. 그 단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더 깊어진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요.”
셀린 송 감독은 첫 영화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자신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다”며 “유태오, 그레타 리 등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하고 허구한 날 인연 타령을 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매일 행복했고, 신났고, 평생 하고 싶었다”면서 “영화를 만들면서 제 자신을 깊게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