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마이크 실트 샌디에이고 감독은 팀의 스프링트레이닝 ‘풀스쿼드’가 된 17일(한국시간) 취재진을 만나 하나의 깜짝 발표를 했다. 바로 팀의 중앙 내야수(2루수‧유격수)끼리의 포지션 변환이었다. 지난해 유격수를 보던 잰더 보가츠가 2루로 가고, 2루를 보던 김하성이 유격수로 간다.
사실 이는 오프시즌 내내 샌디에이고의 곁을 머물던 최고의 화두였다. 두 선수의 포지션을 바꾸는 게 팀 전력에 더 이득이 될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올스타 유격수인 보가츠는 개인 경력에서 무려 5번이나 실버슬러거를 차지할 정도의 화려한 공격력을 갖춘 선수다. 이는 2023년 시즌을 앞둔 11년 총액 2억8000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으로 이어졌다. 공격적인 재능에서는 분명 김하성을 앞선다.
하지만 보가츠는 경력 내내 수비가 그렇게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경력 초창기에는 모든 수비 지표에서 리그 평균보다 못했다. 근래 들어 조금씩 좋아지는 양상은 있었지만, 그래도 리그 수비 최고수들과 비교에서는 한참 떨어졌다. 반대로 김하성은 공격은 보가츠보다 떨어지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다. 2022년 내셔널리그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최종 후보였고, 2023년에는 2루수와 유틸리티 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오른 끝에 결국 유틸리티 부문 최종 수상자로 결정됐다. 2루수, 유격수, 3루수를 모두 오가는 폭넓은 활용폭이 큰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단순히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게 아닌, 세 포지션에서 모두 평균 이상의 수비력을 뽐냈다.
샌디에이고로서는 보가츠를 수비 부담이 덜한 2루수로 옮기고, 김하성을 유격수로 옮기면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오프시즌 중 이를 논의한 끝에 결국 스프링트레이닝이 공식 시작되기 전 결론을 낸 것이다. 2억8000만 달러를 받는 보가츠의 자존심이 상할 법한 결정이었지만 구단의 뜻은 확고했고 보가츠도 어느 정도는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이끌었다.
이번 포지션 변경은 보가츠의 2루 전향이 일단 큰 화제다. 샌디에이고는 보가츠와 11년 계약을 했다. 물론 계약 후반부에는 그를 2루나 지명타자로 활용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년 만에 포지션을 바꿔버렸다. 추후 복귀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현지 언론에서는 “샌디에이고의 투자가 잘못됐다”는 비판적 논조를 보인다. 그런데 이 포지션 변경은 김하성의 관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김하성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건 선수뿐만 아니라 구단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장 김하성은 2024년 시즌이 끝나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는다. 2025년 상호 옵션이 있기는 하지만 김하성이 이를 실행할 가능성은 제로다. 김하성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시장 상황 또한 좋다. FA 시장에 마땅한 중앙 내야수가 없다. 2루수 쪽에서는 최대어였던 호세 알투베(휴스턴)가 FA 시장에 나오기 전 일찌감치 소속팀과 연장 계약에 합의했다. 유격수로 시장에 관심을 끌 만한 선수는 김하성과 윌리 아다메스(밀워키) 정도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은 메이저리그 FA 시장에서도 유효하다. 김하성을 위한 판이 깔린 것이다. 같은 공격 성적이라고 해도 2루수로 보여주는 것과 유격수로 보여주는 건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김하성은 본의 아니게 FA 대박의 자격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 또한 18일(한국시간) 다가올 비시즌, 즉 2024년 시즌이 끝난 뒤의 FA 시장 프리뷰에서 각 포지션별 최고 선수를 뽑았다. 기본적인 야구 포지션에 유틸리티 부문을 추가한 총 11개 부문이었다. 김하성은 유틸리티 부문에서 최고 자리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2025년 김하성과 계약하는 팀이 그를 어디에 배치시킬지 알 수 없기에 일단 유틸리티로 분류한다고 명시했다. 2루수, 유격수, 심지어 3루수로도 뛸 수 있는 김하성의 포지션 활용도 매력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유격수가 필요한 팀은 물론 2루수가 필요한 팀도 김하성에 달려들 수 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김하성은 2루수나 유격수 부문에도 이름을 올릴 수 있고, 어느 포지션에서도 훌륭한 수비가 가능한 선수다. 3루수로도 뛸 수 있다’면서 ‘그는 지난해 2루수로 전향한 뒤 개인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며 역시 뛰어난 수비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어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김하성의 타격은 메이저리그에서 발전했다. 삼진 비율을 낮추고 볼넷 비율을 높여 평균 이상의 공격력을 보여줬다’면서 ‘또한 새로운 규칙(피치클락, 베이스 크기 물리적 확대)을 활용해 지난해 38개의 도루를 기록했다’면서 김하성의 올라운드함을 부각했다.
사실 김하성의 수비가 인정받는 데는 1~2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당장 2022년 유격수 부문에서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뽐냈고, 2023년에는 2루수 부문에서도 그랬다. 3루도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주력도 평균 이상이었고, 평균 이상의 주자로 평가받은 지도 꽤 됐다. 문제는 공격이었는데 김하성은 지난 2년간 이 공격력에서도 비약할 만한 발전을 이뤘다. 출전 시간이 들쭉날쭉했던 2021년에는 공격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메이저리그에 적응하고 출전 기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가자 공격에서도 수직 상승했다.
실제 통계전문사이트 ‘팬그래프’의 집계에 따르면 김하성의 조정득점생산력(wRC+)은 2021년 71에 불과했다. 이는 비교군 평균 대비 29%나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22년에는 106으로 비약적인 상승을 이뤘고, 지난해에는 이 수치를 112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리그 평균보다 꽤 유의미한 차이로 더 높은 공격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됐다. 한 번 감을 잡은 만큼 이 수치가 더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비는 노쇠화가 상대적으로 더딘 만큼 올해 수비력은 지난해 수준을 충분이 유지할 것이라 기대할 만하다. 지난해 수준의 공격력을 유격수에서 보여준다면 가치는 어마어마해진다. 북미 스포츠전문매체 ‘디 애슬레틱’의 샌디에이고 담당기자 데니스 린은 지난 오프시즌 당시 김하성과 재계약하려면 총액 1억3000만 달러에서 1억50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유격수로도 지난해 공격 수치를 찍으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실제 지난해 시즌을 앞두고 시카고 컵스와 7년 총액 1억7700만 달러에 계약한 댄스비 스완슨이 자주 비교된다. 스완슨도 김하성 못지않은 훌륭한 수비수다. 다만 유틸리티 능력에서의 검증은 김하성 쪽이 더 유리하다. 스완슨은 2021년 wRC+ 99, 2022년 116을 기록한 뒤 FA 시장에 나와 대박을 터뜨렸다. 수비와 공격이 모두 가능하다는 이유다. 올해 wRC+는 104였다.
김하성의 wRC+를 놓고 보면 스완슨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경력 전반에서는 스완슨이 조금 더 나은 공격력을 지녔지만, 지난해 wRC+를 놓고 보면 스완슨이 104, 김하성이 112로 오히려 김하성이 더 높은 득점 생산력을 뽐냈다. 게다가 시장에 유격수가 없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이고, 스완슨이 계약하던 시절보다는 시장에 돈이 더 풀리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지고 있다. 물론 스완슨보다 한 살 더 많은 시기에 FA 시장에 나오기는 하지만, 경쟁이 붙는다면 이 정도 대우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샌디에이고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샌디에이고는 팀 연봉을 감축하는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당분간은 큰 돈을 쓰기 어렵고, 이미 장기 계약자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2024년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는 김하성과 계약하기 어려울 수 있다. 김하성의 가치도 이미 1억 달러 이상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즌 중 트레이드로 아쉬움을 정리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떠오를 전망이다. 어차피 못 잡을 것, 유망주라도 조금 얻고 파는 게 낫기 때문이다.
김하성이 유격수로 활약하는 것과 2루수로 활약하는 것은 트레이드 가치에서도 차이가 난다. 김하성이 유격수로도 좋은 활약을 할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당장 2루수로 뛰고 있다면 시즌 중 전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 이는 트레이드 가치에 마이너스가 될 수는 까닭이다. 하지만 시즌 시작부터 유격수로 뛰면 이런 문제가 없다. 샌디에이고가 보가츠와 포지션 변환을 추진한 하나의 이유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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