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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이렇게 희생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가장 크죠. 동료마저 없다보니 이게 악순환이더라고요. ”
김태정 대한뇌졸중학회 홍보이사(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14일 서울경제와 만나 “후배 의사에게 뇌졸중 전문의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며 고개를 떨궜다.
학회가 이날 오전 웨스틴조선호텔 서울에서 개최한 ‘초고령화 사회 뇌졸중 치료시스템 구축을 위한 현황 분석 및 발전 방안 모색’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뇌졸중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수 천명 늘린들 뇌졸중 지원자가 늘어날지 의문”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급실 뺑뺑이’로 대변되는 필수의료 붕괴 위기를 해결하려는 정책의 취지에 공감하지만, 의대 증원이 필수 중증 의료분야 유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디테일'(세부사항)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뇌혈관이 갑자기 막히거나 터져서 발생하는 뇌졸중은 골든타임 사수가 중요한 대표 질환으로 꼽힌다. 증상 발생 후 4.5시간 이내 혈전용해제가 투여돼야 생명을 건지는 것은 물론, 후유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다. 현재 학회로부터 정맥내 혈전용해술과 동맥내 혈전제거술 등 초급성기 재관류치료가 가능하다고 인증을 받은 기관은 84곳이다. 그런데 작년 기준 전국 84개 뇌졸중센터에 근무하는 신경과 전임의는 14명으로, 2018년 29명 대비 반토막 났다. 뇌졸중을 비롯해 중증 응급질환 치료를 담당해야 할 권역심뇌혈관센터 14곳 가운데 뇌졸중 전임의가 근무 중인 센터는 분당서울대병원 한 곳 뿐이었다. 배희준 대한뇌졸중학회 이사장(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은 “필수의료 분야 의사인력을 늘리기 위해 의대 정원을 확대한다는 건 ‘수능을 잘 보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며 “의대 졸업 후 뇌졸중 진료를 보지 않겠다는 의사들을 어떻게 하면 오게 할 지가 최근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토로했다. 전공의들의 수련환경부터 전문의들의 근무 여건에 이르기까지 뇌졸중 분야 지원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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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현장의 급한 불을 끄려면 뇌졸중 등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 수가 늘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전국 상급종합병원과 수련병원 뇌졸중 전문의를 합쳐도 뇌졸중 전문의는 209명에 불과하다. 단순히 따져봐도 권역심뇌혈관센터 전문의 1명당 뇌졸중 환자 400~500명을 진료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심지어 소위 ‘빅5’로 불리는 서울 상급종합병원 5곳(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성모병원) 중에도 뇌졸중 전임의가 없는 병원이 있다. 배 이사장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2050년에는 매년 35만 명의 새로운 뇌졸중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환자 수에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데 시간은 많지 않다”며 “올해 초 정부가 국가 인적네트워크 사업을 시작했지만 애시당초 인력이 있어야 인적 네트워킹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비단 전문의 뿐 아니라 전공의도 부족하다. 학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신경과 전공의 정원은 86명, 정책 T.O로 배정된 25명을 합쳐도 111명이다. 전국 수련병원 74곳은 운이 좋아야 매년 전공의 1명이 채워진다. 1~4년차 레지던트 중 1명만 전문의 시험을 보기 위해 빠지면 구멍이 나는 구조다. 갓 인턴 꼬리표를 뗀 1년차 레지던트가 배정되는 3월에는 백업을 봐주느라 진료과 전체가 비상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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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관 대한뇌졸중학회 질향상위원장(동아대병원 신경과 교수)은 “현재 전문의 숫자는 뇌졸중 안전망이 유지되기 위한 최소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수련병원 74곳이 각 연차 당 최소 2명을 채우려면 적어도 160명, 현재의 약 2배 수준으로 증원되어야 안정적으로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중 전문의 중심의 진료 시스템이 구축되려면 향후 전문의가 될 수 있는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 증원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다.
젊은 의사들이 뇌졸중 등 필수의료 분야를 기피하는 근본 원인을 고려할 때 정책수가를 비롯한 최소한의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실제 뇌졸중은 신경과 전공의 1인당 응급진료 건수 1위에 해당하다. 진료과의 응급실 중증 환자 부담 역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높은 진료 업무 강도에 비해 정작 신경과 의사가 뇌졸중 의심 환자를 진료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진찰료 자체가 없는 게 국내 현실이다. 뇌졸중 전임의는 뇌졸중 의심 환자가 발생할 때마다 밤새워 전화를 받으며 ‘온콜'(호출당직)을 서도 대부분의 경우 당직비 자체가 지급되지 않는다. 24시간 뇌졸중 집중 치료실 전담의의 근무 수당은 2만 7730원, 시간당으로 환산할 경우 최저시급은 커녕 1000원에도 못 미친다는 의미다.
김 홍보이사는 “초급성기 뇌졸중 환자에게 시행되는 정맥내 혈전용해술의 수가는 20만 원으로 해외 국가의 5분의 1 수준”이라며 “반려동물의 컴퓨터단층촬영(CT) 비용이 7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보니 밤새워 환자를 볼 때마다 현타가 온다는 후배의사의 말을 차마 반박하기 힘들더라. 비급여 영역으로 빠지는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필수의료 분야로 유입되려면 보상체계가 정상화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경복 정책이사(순천향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졸중은 발생 환자의 80%가 후유장애를 얻을 만큼 중증 질환이지만 정작 수술이나 시술을 받는 일부 환자만 전문진료질병군으로 분류되고 있다”며 “전문진료질병군 환자를 30% 이상으로 진료해야 상급종합병원 지정 기준이 유지되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뇌졸중 환자 진료에 대한 관심과 진료량이 감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급성기 뇌졸중 환자의 치료가 주로 이뤄지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치료가 소홀해지지 않으려면 질병의 분류체계를 바로 잡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다.
배 이사장은 “초고령화사회에서 뇌졸중 치료 체계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인적 자원 확보, 보상 체계 마련, 질병군 체계 분류 수정 등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수적이다. 치료 사각지대 없이 뇌졸중 발생 예방부터 급성기 치료, 장기적 관리까지 체계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속히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학회는 뇌졸중 예방부터 급성기 치료 이후 관리까지 대한민국 초고령화 사회 필수 중증 질환인 뇌졸중 치료시스템 구축과 국민들의 건강한 노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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