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임팩트 변윤재 기자]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는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2022년 10월, 삼성전자의 회장 직함을 받아들인 이재용 회장을 이와 같은 소회를 밝혔다. 부진인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별세 이후 만 2년이 지날 때까지 ‘회장’직을 수락하지 않던 이 회장이었다. 그런 이 회장이 공식 직함을 달게 된 것은 총수 공백의 한계를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회장이 승진을 앞두고 사장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절박한 상황” “엄중하고 냉혹한 현실” “어렵고 힘든 때” 같은 표현을 썼다. 그룹의 구심점인 총수는 위기 상황에서도 ‘도전’을 강조한다. 이 회장의 발언은 녹록치 않은 현실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이 회장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기술경영, 인재경영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 회장이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처지다. 검찰이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재판과 관련, 이 회장이 무죄를 선고받자 이에 불복, 지난 8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최소한 1년 이상 또다시 서초동에 붙들리게 된 셈이다.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무죄’ 선고에 재계 기대감 커졌지만…
13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는 늦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회장이 무죄를 받으면서 삼성전자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이 일정 부분 해소됨에 따라 이사회 입성을 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왔다. 검찰의 항소로 이 회장은 오너경영인으로서 나서는 대신 현재와 같은 정중동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 회장의 무죄 선고 이후 ‘변화’를 기대했던 재계에서는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의 위상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그룹의 핵심 동력인 삼성전자는 국내 시가총액 1위를 지켜왔다. 양적 성장과 수익성, 질적 성장이 균형을 이루며 시장의 기대에 부응한 결과다. 실제 삼성전자는 투자, 고용, 사회공헌(CSR) 등 기업 경영 전반에 걸쳐 선도해왔다. 재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삼성은 이미 ‘기준’이 됐다. 삼성이 하면 다른 기업들도 따라간다”며 “전자, 금융, 건설, 바이오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파급효과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고 말했다.
이 회장 선고 직후 재계 주요단체들은 환영 논평을 낸 이유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첨단산업 주도권 경쟁이 치열한 현재, 이 회장의 무죄 판결은 경제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4대 그룹 모두 총수 중심 체제 구축
총수의 사법 리스크에 재계,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총수가 실질적으로 기업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다. 삼성, SK, 현대차그룹, LG 등 국내 재계 4대 그룹은 총수 중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총수가 일관된 미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전사 실행력을 높아지게끔 독려하는 구조다. 중요 의사결정을 총수가 내리는 만큼, 대규모 설비투자, 조 단위 인수합병(M&A) 등을 신속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등기임원일 경우에는 장점이 더 극대화 된다. 총수도 경영적 판단의 잘잘못을 평가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성과와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큰 고객사’를 잡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것은 물론, 이사회에 투자 필요성을 적극 제안하거나 설득하기도 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핵심 계열사 대표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주력 사업을 직접 챙기고, 그룹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책임경영은 기업가치를 높이는 요인이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데일리임팩트에 “오너 경영자가 대표이사나 사내이사 등을 맡아 책임 경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오너 경영인의 부재…초격차 DNA 희석
삼성은 다르다. 4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임원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로부터 동일인(총수)으로 지정됐으니 미등기임원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미등기임원이라고 해서 그룹의 수장으로서 역할하는 데 제약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친환경 사업을 가속화하기 위해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미등기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단, 최 회장은 지주사인 SK㈜ 이사회에 참여해 경영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미등기임원 상태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삼성이 오너 중심 체제가 강한 그룹이라서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경영 책임은 지지 않는 상황이 삼성 특유의 ‘초격차’ DNA를 희석시켰다는 것이다. 삼성 위기론이 증폭된 시점도 이 회장의 입지가 줄어든 2017년 이후부터다.
삼성 역시 경쟁사와의 격차가 벌어진 이유를 ‘총수 부재’에서 찾는다. 삼성 내부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데일리임팩트에 “1년짜리 단기 전략이나, 2~3년이 소요되는 중기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데에는 전문경영인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도 있다”면서도 “기업의 규모 면이나 영향력에서 삼성은 전문경영인이 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2017년 이후 삼성이 ‘수성 전략’에 치중하는 것도 오너에 의존해왔던 체제가 흔들린 까닭”이라고 짚었다.
지난 2022년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5년간 450조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성장 전략을 달구기 위해 위탁생산(파운드리), 설계(팹리스), 바이오 등 분야별 중장기 실행계획도 확정됐다. 하지만 이 회장이 오너 경영인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경영 투명성, 절차적 당위성, 사업 실행력에서 누수가 발생하고 있다. 경쟁사와 대조적이다.
SK그룹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중심의 BBC 전략에 무게를 실으면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핵심부품인 HBM 시장 1위에 올랐다.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기반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해나가는 중이다. 인도네이사 등지에서 전기차 판매량을 늘리며 선두기업 입지를 다지고 있다. LG그룹은 가장 먼저 초거대AI를 내놓은 뒤 사업 전반에 녹이며 체질 개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핵심 계열사의 전장사업은 인상적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법 리스크 지속…”등기이사 복귀 어려울 듯”
총수가 미등기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규제 당국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공정위는 “총수 일가가 지분율이 높은 회사에 재직하면서 권한과 이로 인한 이익은 향유하면서도 그에 수반되는 책임은 회피하려 한다”고 문제 삼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기류를 고려, 다음달 정기주주총회에서 이 회장이 등기이사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회장은 2019년 10월 등기이사 임기가 만료된 뒤 미등기임원을 유지 중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 회장을 둘러싼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이 해소되지 않아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데일리임팩트에 “자본시장법 등에 따라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지만 검찰이 항소했으므로 사법 리스크는 계속되게 됐다”면서 “1심 판결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낮지만 경영 보폭을 넓히기엔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또한 이 회장이 미등기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소극적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삼성전자의 주가가 횡보하고, 반도체 업황으로 경영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일선 소장은 데일리임팩트에 “투자자들이 ‘오너 경영인으로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난감한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며 “등기임원 복귀는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최 회장처럼 이사회 의장을 맡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이 또한 현실화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성SDI·삼성SDS는 최근 선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다. 사외이사에 이사회 소집·현안 보고 요구 권한을 부여해 이사회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욱이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조하며 의장을 외부인에게 맡겨왔던 만큼, 이 회장이 섣불리 나서기도 여의치 않다.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삼성카드·삼성자산운용·삼성물산 등 주력 8개사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가 맡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하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상장사의 68%가 선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다. 삼성이 선진 경영 구현을 부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법적 문제에 연루된 이 회장의 이사회 복귀를 서두르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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