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차량 불법 재수출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13일 방문한 서울의 한 BMW 전시장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BMW 딜러사들은 최근 소비자에게 “BMW의 신차를 국제 제재 대상 국가나 한국 정부의 수출 통제 대상 국가에 수출하면 대외무역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BMW그룹과 BMW 공식 딜러사는 불미스러운 상황을 방지하고 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할 예정”이라고 고지하고 있다. BMW 딜러사는 소비자들에게 ‘수출 통제 규정을 준수한다’는 취지의 확인서를 쓰도록 한다.
JLR코리아(옛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의 일부 딜러사도 신차를 출고하는 소비자에게 ‘수출 행위 제한에 따른 고객 동의서’를 징구하고 있다. 해당 동의서에는 “국내외 법령과 재규어랜드로버의 글로벌 정책을 준수하기 위해, 매수한 차량은 대한민국 이외의 다른 국가로 수출 및 재판매가 제한된다”, “6개월 이내에 차량을 해외로 매각, 수출, 이전 등을 하는 경우 위약금 3000만원을 딜러사에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혔다.
한국토요타자동차 역시 소비자들에게 ‘수출 제한 동의서’를 걷고 있다. 해당 동의서에는 “한국토요타자동차는 러시아, 벨라루스 등 수출 규제 국가로의 수출을 금지하는 대한민국, 미국, 유럽연합(EU) 등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이민 등 합리적인 사유로 매수 자동차를 이전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영리 내지 기타 목적으로 매수 자동차를 대한민국 이외 일체의 다른 국가·지역으로 매각, 수출, 이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적혔다.
수입차 브랜드들이 국내 소비자들에게 ‘수출 금지’ 경고를 보내는 이유는 러시아로 신차를 보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의서를 걷는다고해서 불법 행위를 100% 막을 수 없지만, 국제 제재에 동참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선 신차와 중고차의 품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주요 완성차 기업이 일제히 러시아 현지 생산을 중단했고, 국제 사회가 러시아로 보내는 승용차 수출을 제한하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한국에서 러시아로 가는 중고차 수출이 늘었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신차도 러시아로 향하고 있다. 신차 구매를 원하는 러시아 부호에게 기본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되팔려는 것이다.
스페인 언론 엘파이스에 따르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병행수입 업체는 작년 10월 가입자 5만4000여명을 거느린 자사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메르세데스-벤츠 S400d(W223)를 한국에서 구해왔다”고 공지했다. 이 업체의 러시아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작년 10월 출시된 BMW 신형 5시리즈가 매물로 나와 있다.
해당 업체는 “주행하지 않은 새 상품으로 독일에서 벨라루스로 통관을 완료했으며 모스크바까지 10~15일 내로 배송할 수 있다”고 공지한다. 한국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불법 재수출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업체는 5시리즈 세단의 520i M 스포츠 트림을 790만루블(약 1억1500만원)에 판매 중인데, 이는 국내 가격(7330만원)보다 4000만원 이상 비싼 값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로 중고차 수출이 확 늘었다. 한국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러시아로 수출한 중고차 물량은 연간 1000여대 수준에서 2022년 1만9626대, 작년 2만6955대로 급증했다. 이 중 신차가 중고차로 둔갑해 곧장 러시아로 향한 물량은 정확히 잡히지 않지만, 국내에서 신차로 등록한 뒤 두 달 이내에 중고차 수출 목적으로 말소 처리한 차량이 2021년 254건에서 2022년 2440건으로 급증했다. 2440건이 모두 러시아로 향한 것은 아니지만, 업계는 수치가 이례적으로 급등한 것이 러시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가격이 5만달러(약 6600만원) 이상이거나 배기량이 2000㏄가 넘는 승용차는 러시아로 수출이 금지된다. 이를 어기고 러시아에 자동차 37대와 제트스키 64대를 수출한 40대 A씨와 러시아 국적 50대 B씨는 최근 부산세관에 적발돼 검찰에 송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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