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눈으로 밤 지새운 상인들, 잿더미로 변한 점포 앞에서 망연자실
“설 앞두고 평소보다 5∼10배 많은 물건 들여놨는데…상상도 못해”
(서천=연합뉴스) 강수환 기자 = “활어차 산소통이 여기까지…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안 나오네…”
23일 오전 9시께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상인들이 하나둘씩 수척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수산 장화를 신은 채 새까맣게 변해버린 시장을 바라보던 한 상인은 검게 그을린 활어차 산소통을 보고 그만 고개를 숙였다.
시장에서 15년째 영업 중이라는 이 상인은 “불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잠도 못 자고 나와봤는데 처참한 상황을 보니 말이 안 나온다”며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전날 오후 11시 8분께 시장에서 불이 나 점포 292개 가운데 227개가 탔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한때 소방 대응 2단계가 발령됐을 정도로 불길은 거셌다.
9시간 동안 화마가 휩쓸고 간 시장은 검게 탄 잿더미만 가득했다.
근처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해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대설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검게 그을린 건물에 쌓인 흰 눈이 상인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시장과 함께했다는 권준흘(81)씨는 초조한 표정으로 상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권씨는 “불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한숨도 못 잤다”면서 “설 대목이라 건어물을 많이 들여놨는데, 다 팔지도 못하고 어떻다고 말도 못 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설 대목을 앞두고 수산물 등 물건을 많이 주문해뒀던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화재로 일터와 재산을 모두 잃게 된 상인들은 모여서 한숨만 내쉬었다.
이틀 전 킹크랩만 2천만원어치를 가져다 놓았다는 상인, 건어물 몇천만원 어치를 사놓았다는 상인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어머니 때부터 50년간 장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최모(49)씨는 “설 대목 앞두고 대부분 상인이 고기나 김, 어패류 선물 세트 등 평소보다 5∼10배 이상 되는 물건들을 들여놨었다”면서 “우리도 굴을 평소보다 8배나 많이 들여놨는데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라며 혀를 찼다.
40년간 이곳에서 장사한 노모 뒤를 이어 수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김진수(56)씨도 “불이 난 수산물동 외에도 건조장에 매연 그을음이 생기고 냄새가 배어 아무것도 못 쓰게 됐다. 그렇게 된 생선을 누가 먹겠나”라며 “건조장 아래에 있는 냉동고도 전기가 차단돼 언제 전기가 공급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물건을 다 못 쓴다고 보면 된다”고 허탈해했다.
김씨는 “이 시장이 서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어서 주변 도시 등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찾아주는 곳인데, 시장이 사라졌으니 우리 상인들뿐 아니라 군 전체가 너무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온 가족이 함께 장사로 업을 이어가고 있는 최씨는 “보상은 둘째치고 평생을 장사해오신 분들은 이제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여기 상인들은 일 년에 딱 24일만 쉰다. 341일을 일하던 이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 등 정치인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 일부는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상인은 “오면 뭐 할 것인가. 경호원들 딱 붙어서 제대로 확인이나 하겠나”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상인도 “선거용으로밖에는 보이질 않는다. 얼굴만 보여주고 가려는 것 아닌가”라며 볼멘소리를 터뜨렸다.
충남도와 서천군에서는 상인들에게 행정적인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방침이다.
김기웅 군수는 “설 명절을 앞두고 발생한 재난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상인들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시장 상인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서천특화시장의 신속한 정상화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발화 지점이 전소돼 화재 원인 규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복구 기간도 최소 1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시장 상인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sw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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