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에서 약 1년간 빠져나온 뭉칫돈 일부가 머니마켓펀드(MMF)와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으로 이동했다.
금융감독당국이 랩·신탁 상품의 불법적인 운용 관행에 대해 칼을 꺼내든 상황이라 당분간 신뢰를 회복하긴 어렵다는 관측이다. 더욱이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반영되면서 시중금리가 대폭 내려오자, 랩·신탁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채권형 상품의 매력도가 떨어진 점도 한몫했다.
랩, 신탁서 50조 이탈…MMF, CMA서는 10조 유입
1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권사 일임형 랩어카운트 잔고는 11월 말 기준 93조9000억원으로 작년 1월과 비교해 20조3000억원 줄었다. 지난해 1월31일 기준 잔고는 114조200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점점 내려와 10월에는 100조원 아래로 떨어졌다.
증권사가 운용하는 특정금전신탁에서도 마찬가지로 20조원이 넘는 자금이 빠져나갔다. 특정금전신탁은 고객이 운용상품군을 정하면 증권사가 이에 맞게 굴려주는 상품이다. 11월말 기준 잔고는 217조2000억원으로 작년 1월과 비교해 20조6000억원 감소했다. 채권형과 정기예금형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전체 특금신탁 잔고의 각각 30%를 차지하고 있다.
랩, 신탁상품은 대부분 법인이 단기자금을 굴리는 용도로 활용한다. 1년도 안돼 50조원 가량의 법인 돈이 증발한 셈이다.
반면, 같은 단기자금 운용상품인 MMF와 CMA 잔고는 10조원 가량 늘었다.
법인이 가입한 MMF 잔고는 1월9일 기준 186조3000억원으로 작년 1월과 비교해 9조2000억원 늘었다.
법인 CMA도 15조8000억원으로 1조3000억원 증가했다. CMA는 투자 상품에 따라 환매조건부채권(RP)형, MMF형, 발행어음형, 기타형(머니마켓랩어카운트(MMW))으로 분류하는데 가장 많이 늘어난 건 MMW를 포함한 기타형이다. 여기에 1년만에 8000억원의 자금이 유입됐다. 그 다음으로는 RP형, 발행어음형, MMF형 순으로 자금이 유입됐다.
신뢰도 저하+금리 되돌림 우려에 랩·신탁 기피
이처럼 법인들은 랩·신탁을 빠져나와 다른 단기 운용상품으로 돈을 옮기고 있다. 시장에서는 머니무브의 주요 배경으로 랩, 신탁상품 전반에 대한 신뢰도 하락을 지목하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은 랩어카운트, 특정금전신탁 운용 및 영업실태를 점검한 결과 불법 정황을 다수 적발했다. 2년 전 레고랜드 사태로 수익률이 급락하자 특정고객 손실을 메우기 위해 자전거래를 통해 타 고객 계좌로 채권을 넘기거나, 고유자산으로 손실을 보전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당국은 불법 자전거래를 진행한 9개 증권사의 30명 운용역은 검찰로 넘기기로 했으며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도 제재심의위원회 절차를 밟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운용역은 “법인들이 여유자금을 믿고 맡긴 건데 레고랜드 사태 이후 손실이 많이 난데다가 불법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뢰가 많이 무너진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증권사 자체적으로 판매 규모를 줄이고 있긴 하지만 검찰 조사나 금감원 제재 등이 마무리되면 영업을 계속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채권형 상품 자체에 투자매력이 낮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작년 말 시장 금리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수익률을 회복했지만, 현재는 되돌림 우려가 나오고 있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작년 말부터 금리 레벨이 많이 내려오면서 중금리, 고금리 상품에 대한 수요가 어디로 갈아탈지 고민하고 있는 시기”라며 “다만 랩, 신탁은 정기예금과 비슷한 목적으로 가입하기 때문에 주식처럼 변동성이 큰 상품으로 갈아타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