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에서 불거진 ‘전두환 호칭 논란’은 공영방송의 역사관, 보도 지침 문제 등의 논란으로 일파만파 번졌다. 호칭 논란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 이면에 공영방송 뉴스룸의 폐쇄화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호칭 논란을 다루는 본 기사에서는 전직 대통령을 이름 그대로 쓴다.)
KBS 전두환 호칭 논란은 지난 4일 KBS 보도정보시스템에 김성진 통합뉴스룸 방송뉴스주간이 “전두환의 호칭은 ‘씨’가 아니라 ‘전 대통령’으로 통일해주기 바란다”고 공지한 글에서 비롯됐다. 김 주간은 공지글에서 “전 대통령은 존칭이 아니다. 대한민국 11, 12대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에 대한 지칭일 뿐”이라며 “김일성을 주석으로 부르고,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부르고, 김정은도 국무위원장으로 부르는데, 전두환만 씨로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앟는다”고 주장했다.
이날은 2021년 사망해 고인이 된 전두환과 그 일가의 추징금이 추가 환수된다고 전해진 날이다. 전두환 차명재산으로 판단돼 압류된 임야 필지에 대해 공매대금 취소소송을 냈던 신탁사(교보자산신탁)가 상고를 포기하면서 임야 공매대금 55억 원을 환수하게 됐다. 전두환은 1997년 반란수괴·내란·내란목적살인 등 13가지 혐의가 인정돼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이 확정됐고, 이제껏 1282억 원이 환수됐다. 이번이 국고로 귀속될 수 있는 마지막 추징금이기에 나머지 867억 원은 미납될 전망이다.
당일 KBS가 내보낸 전두환 관련 기사는 5건. 그 중 2건의 리포트가 ‘전두환 전 대통령’, 3건의 기사(단신, 지역국 기사, 이슈영상)가 ‘전두환 씨’라는 호칭을 썼다. 같은 날 주요 방송사의 경우 MBC, SBS, JTBC, YTN, JTBC, MBN이 ‘전두환 씨’, TV조선, 채널A, 연합뉴스TV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KBS 기자협회가 내부 게시판에 정리해 올린 자료에 따르면 KBS는 전두환이 퇴임한 1988년 이래 ‘전 대통령’ 호칭을 사용하다, 1995년을 기점으로 ‘전 대통령’과 ‘씨’를 혼용하기 시작했다. 5·18 특별법 제정으로 12·12사건과 연관된 전두환·노태우 등이 주요 수사 대상에 올랐던 1995년 11월, KBS 메인뉴스(뉴스9)는 앵커나 기사에 따라, 혹은 한 기사 내에서도 ‘씨’와 ‘전 대통령’을 혼용했다.
그러던 KBS는 2008년~201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주로 사용했고, 2018년부터는 ‘전두환 씨’ 사용 비중이 커졌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자 전두환이 5·18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며 고 조비오 신부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2020년도 분기점이 됐다. 이듬해 전두환 사망 당시엔 ‘전두환 씨’로 호칭이 통일됐다. 2021년은 KBS 외에도 다수 언론의 전두환 호칭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던 시기다.
이처럼 여러 언론 매체가 저마다의 기준으로 차이를 두는 호칭이나 표현에 대해선 관련 결정을 내린 절차나 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KBS 내부에서도 전두환을 불러야 할 주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여러 논의가 이뤄져왔다.
KBS 기자협회가 발췌한 취재제작회의 기록에 따르면 KBS 보도국(통합뉴스룸)은 2019년 어린 학생 등이 전두환을 모를 수 있다는 의견 등을 고려해 기사 처음에는 전직 대통령이라고 특정한 뒤 ‘씨’를 붙이자는 의견이 나왔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둔 2020년 5월엔 과거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전두환 호칭을 ‘씨’로 통일하기로 했고, 2021년에도 이 결정을 이어 받기로 했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해 6월 회의에선 ‘전두환 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이들 중 유독 전두환만 씨로 통일하는 이유 등에 대해 근거를 정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반면 이번 호칭 논란은 일방적 공지가 발단이 됐다는 차이가 있다. 김성진 주간은 과거 2021년에도 KBS 내부 게시판에 KBS 뉴스가 ‘전두환 씨’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순자 씨’ ‘이설주 여사’ 등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면서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책임 있는 분의 답변을 요청한다”는 게시글을 올렸다. 이번엔 본인이 KBS 통합뉴스룸의 책임자급 인사가 된 상황에서 호칭 통일을 지시한 것이다.
김 주간은 지난해 11월에도 ‘한중일’ 대신 ‘한일중’, ‘북미’ 대신 ‘미북’ 등을 사용하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은 사용을 자제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통상적 표현인 ‘한중일’ 대신 ‘한일중’, ‘북러’ 대신 ‘러북’ 등의 표현을 사용한 일과 맞물려 논란을 불렀다.
KBS 내부에선 호칭 논란이 KBS 뉴스룸의 폐쇄화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KBS 기자는 “내부에서 기자협회가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네 알겠습니다’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며 “기자협회장의 편집회의 참여에 대해 (간부들이) 공개적으로 불편함을 거론했다더라. 얼마 전에는 기자협회의 기록물 게시를 비판하기도 했다. 문제가 외부로 알려지는 언로 자체를 막겠다라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이 구성원은 “회의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공개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라면서 “(뉴스룸이)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고, 구성원들도 모르는 결정이 이뤄지고, 공론화되지 않으면 기자 개인이 저항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올 것 같다”고 우려했다.
KBS 안에서의 논의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KBS 기자는 “‘전 대통령’과 ‘씨’에 대한 각각의 저널리즘적 논거와 시각이 있다”며 “정치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저널리즘적 관점에서 논의가 이뤄져서 결론이 나면 좋겠다. 외부에서도 관심 대상이 된 사안인 만큼 외부에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전례와 근거와 논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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