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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셋 낳은 남편이 게이였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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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고, 아이 셋을 둔 아버지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보조 지휘자였던 20대의 그는 1943년 공연 당일, 심한 감기로 자리를 비운 주 지휘자 대신 훌륭한 지휘를 선보이며 성공적인 카네기홀 데뷔를 맛본다. 젊은 나이에 크게 이름을 떨친 그의 삶에는 분명 음악을 향한 낭만적인 열정 있었다. 동시에 그 열정을 넘어서는 지독한 욕망도 잔뜩 품었다. 아내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동성의 연인들과도 지속적인 쾌락을 쫓았다.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포스터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포스터

내년 1월 열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이야기다. 20일부터 넷플릭스로 스트리밍 중인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12년간 이끈 음악감독이자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음악을 쓴 미국의 유명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의 전기 영화다. 그런데 이번 영화가 집중하는 건 그의 음악적 세계관보단 내밀한 개인사에 가깝다. 대성한 예술가이자, 자상한 남편이자, 아이 셋의 아버지이자, 방탕한 게이였던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이 아내 ‘펠리시아’(개리 멀리건)와 나눴던 독특한 유대관계에 집중한다.

아내 ‘펠리시아’는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배우였다.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남자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용기 있는 여자였다. 남편이 거장 스승 ‘쿠세비츠키’에게 뮤지컬이 아닌 오케스트라에 집중하라는 꾸중을 듣던 날, 조용한 귓속말로 “당신이 만든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말하며 ‘번스타인’의 사기를 북돋아준 것도 아내였다. 그토록 공고할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유대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한 파티에서 젊은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키스하는 머리 희끗한 남편의 뒤태를 본 순간. 그제야 ‘펠리시아’는 떠올린다. 자신의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받던 남편이 종종 이유 없이 쓸쓸하고도 울적한 표정을 짓던 순간들을.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이쯤 되면 대단한 예술가인지는 몰라도 한 인간으로서는 그다지 편들어주기 어려운 남편 ‘번스타인’과 그에게 상처받을 게 뻔한 아내 ‘펠리시아’의 그저그런 치정극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 배우 브래들리 쿠퍼라는 걸 알면 마음가짐은 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의 복잡미묘한 빛깔을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해 온 배우이기 때문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3)에선 바람피운 아내를 잊지 못하는 덜 떨어진 순정파 이혼남으로, <스타 이즈 본>(2018)에선 무명 가수를 반려자로 맞아 스타 반열에 올려주고 정작 자신은 마약중독으로 죽고 마는 비극적인 기혼남으로 열연하면서 큰 호응을 끌어냈다.

그 작품들에서 브래들리 쿠퍼와 호흡을 맞춘 여성 캐릭터들이 유독 찬란하게 빛났던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단박에 ‘동급 최강 연기’ 칭호를 듣게 된 당시 신인 배우가 지금의 할리우드 스타 제니퍼 로렌스고, 브래들리 쿠퍼의 연출 데뷔작 <스타 이즈 본>에 출연하면서 대가수로서의 기존 정체성을 뛰어넘어 자질 있는 배우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하게 인정받게 된 주인공이 팝스타 레이디 가가였으니 말이다. 이들이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비애를 각자의 개성 있는 연기로 풀어낼 때, 그 곁에 버팀목처럼 서 있던 동료 영화인이 브래들리 쿠퍼였다.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스틸컷

브래들리 쿠퍼의 두 번째 연출작인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서도 예상대로 주인공 ‘번스타인’만큼이나 아내 ‘펠리시아’ 역을 맡은 캐리 멀리건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는 남편 ‘번스타인’과 세 아이를 낳았고, 뒤늦게 남편이 게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끝내 이별을 선택하지는 못한 여인을 연기한다.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한 관계를 끌어안고 중년이 된 ‘펠리시아’의 심경을 표현한 캐리 멀리건의 중후반부 클로즈업샷은 지난 날을 돌이키는 회한 서린 얼굴을 섬세하고 적확하게 묘사한다. 그건 ‘한 남자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해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주체적인 자성에 가깝다. “내가 오만했지. 그 남자가 주는 정도의 사랑에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우습지? 아빠 관심을 갈구하는 내 자식들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워했으면서도, 난 혼자 잘난 척하느라 그의 관심따윈 필요 없다고 했던거야.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봐라. 그동안 진짜 정직하지 못했던 건 누굴까?”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 비록 사랑에 관한 헤피엔딩을 다루는 작품은 아닐지언정, 안전하고도 단단한 사랑의 유대관계를 갈구하는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상념을 품게하는 힘을 지닌 작품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내가 선택한 배우자, 내가 꾸린 가정, 내가 결정한 모든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지금의 상황이 과연 내가 나를 제대로 알고 내린 결과물인지 스스로 묻게 될 테니까. 설령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예술가를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이라도 삶과, 사랑과, 모종의 결단 앞에서 고민해 본 적 있는 경험만으로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들 수 있을 듯싶다.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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