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간 ‘테크전쟁’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지난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미중 정상회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양국 갈등이 재점화하는 모양새입니다.
그간 첨단 반도체를 타깃 삼아 중국을 압박해온 미국이 이번엔 ‘범용 반도체’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는데요. 이에 중국은 희토류의 가공기술 수출 금지령을 내리며 맞대응에 나섰습니다.
미중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양국의 갈등 양상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문가들의 전망을 들어봤습니다.
압박 높이는 미국, 받아치는 중국
2020년부터 사실상 시작된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규제는 지난해부터 본격화됐습니다. 올해 들어선 더욱 강화된 조치들이 발표됐는데요.
미국은 올 9월 첨단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인공지능(AI) 등 3가지 부문의 대중 투자규제 행정명령을 내렸고, 10월엔 저사양 AI 반도체 수출길까지 틀어쥐었습니다. 중국의 첨단 기술개발을 전면 차단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실린 것이죠.
이처럼 미국은 첨단 반도체를 위주로 중국에 대한 압박을 이어왔는데요. 최근엔 규제 전선을 더욱 넓히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내년 1월부터 미국 내 방산·자동차·통신 등 주요 산업 분야서 중국산 범용 반도체를 얼마나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실태 조사에 착수한다는 방침입니다.
상무부가 이를 발표할 당시 조사시행 목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제기되는 국가 안보상의 위험을 낮추기 위함”이라고 공식 언급한 만큼 추가규제 가능성을 사실상 시사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향후 중국산 범용 반도체에 관세부과 등 무역조치가 검토될 가능성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범용 반도체’는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 전기밥솥 등 다양한 기기에 사용되는 반도체를 의미합니다. 통상 20나노미터(nm·10억분의 1m) 이하의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저성능 반도체입니다.
이에 중국은 희토류 수출제한 범위를 넓히며 맞불을 놨습니다. 희토류는 첨단산업 필수 광물인데요. 중국은 세계 희토류 생산의 약 60~70%를 차지하는 주요 생산국입니다. 미국의 대중 의존도도 높습니다. 2018∼2021년 기준 미국의 중국산 희토류 수입 의존도는 74%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범용·레거시 장악 속도 높이는 중국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번 추가 제재를 ‘대중 전방위 압박’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초 미국은 첨단 반도체 규제를 통해 중국 반도체 산업 전반에 브레이크를 걸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제한적이었는데요.
미국의 규제로 반도체 산업 육성이 막힌 중국은 노선을 틀어 범용 반도체에 집중, 해당 시장서 글로벌 지배력을 빠르게 높이고 있습니다.
특히 레거시(구형) 공정을 사용한 반도체 성장이 눈길을 끕니다. 반도체업계는 28나노 이상의 반도체를 구공정으로 분류해 레거시로 칭합니다. 아울러 범용 반도체는 첨단 제조공정이 활용되지 않아 ‘레거시 반도체’로 불리기도 하죠.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레거시 공정서 중국 점유율이 올해 29%에서 2027년 33%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올해 1위는 대만이 49%로 압도적이나, 2027년 42%로 떨어져 중국과의 격차가 9%포인트까지 좁혀질 것이란 관측입니다.
아울러 ‘범용’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알 수 있듯 시장 지배력이 큰 제품이라는 점도 미국에겐 위협요인입니다. 현재 기준 범용 반도체의 수요 비중은 75%로 첨단 반도체 대비 월등히 높습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미국은 대중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로 중국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봤지만 의외로 중국이 범용 반도체 분야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며 “현 시점에서 규제하지 않으면 중국의 점유율이 확대될 수 있고 향후 미국 반도체 분야 및 경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맞닥뜨릴 시나리오 3가지
문제는 미중 사이에 끼인 한국입니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우선 낙관론입니다. 미국의 이번 조치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반사이익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요.
보다 구체적으로 미 상무부가 중국 범용 반도체 추가 수출 규제를 현실화할 경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범용 반도체 재고 소진에 긍정적일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미 상무부의 이번 조치는 낸드 가격 인하를 통한 점유율 확대 전략을 펼치고 있는 중국 반도체기업 YMTC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낸드 사업은 내년 하반기부터 공급 축소 효과에 따른 가격 상승으로 흑자 전환이 전망된다”고 진단했습니다.
긍정·부정적 영향 모두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특히 재고소진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란 예상입니다. 여기에선 ‘범용 반도체’와 ‘레거시 반도체’를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도와 공정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국내 기업들이 주로 생산하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범용 반도체에 해당하지만, 생산 공정으로 따지면 레거시 공정이 아닌 ‘첨단 공정’에 속합니다. 미국이 조사 예정인 범용 반도체는 레거시 공정을 위주로 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올해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 생산하는 반도체 가운데 레거시 공정이 적용된 제품 비중은 10% 미만으로 알려집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입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최근 업황 침체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하는 대신 레거시 제품에 대해선 감산을 결정했고, 이는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제품들에는 주로 첨단 공정이 적용된 만큼 이번 미국 조치로 인한 영향은 긍정과 부정 모든 면에서 미미할 것”이라고 관측했습니다.
일각선 미중 갈등 장기화로 반도체 생태계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도 나옵니다. 미국이 중국의 범용 반도체까지 규제할 경우 이와 관련된 국내 소부장 중소기업들의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종환 교수는 “반도체 공급망은 생태계로 얽혀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분명 다른 곳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며 “중국과 이어진 국내 중소기업들의 부분적 피해가 우려되고, 외부 변동에 의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국내 기업 위주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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