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민시는 ‘높고 평탄한 곳에서 하늘을 보며 나아가라’라는 뜻의 ‘예담’을 자신의 호(號)로 사용한다. 조선시대의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처럼 자신의 이름 앞에 호를 붙이는 여배우라니. 독특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쩐지 자신만의 결의를 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배우로서 ‘올바르게’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의지 말이다.
1995년생 고민시는 신인인만큼 작품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팔색조와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전작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휙휙-캐릭터를 변주하기 때문이다. 분홍색 헤어롤을 앞머리에 말은 똑단발의 귀여운 얼굴과는 상반된 “시끄러. 이년아. 이 언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요”라는 거친 입담을 지닌 영화 ‘마녀'(2018)의 고등학생 명희의 이미지는 ‘스위트홈’ 시즌 1(2020)의 옥상에서 발레 토슈즈를 신고 연습하는 이은유의 모습을 보고는 깜빡 잊었더랬다.
명석한 두뇌로 재난과도 같은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오빠 이은혁(이도현)과는 달리 매사에 툴툴대고 삐딱하기 그지없는 이은유는 이른바 밉상 캐릭터다. 주민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는 일마다 초를 치니, 예쁘게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고민시는 평면적으로 보일 수도 있던 이은유를 하나로만 단정 지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해냈다. 괴물화가 진행 중인 차현수(송강)에게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으니까. 네가 알아서 붙여”라고 말하면서도 자해 흔적이 남은 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괴물을 잡기 위해 덫을 설치하고 연습하는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막상 상황이 도래하니 가장 먼저 뛰쳐나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연습은 해서 뭐해? 도대체”라며 특유의 신경질적인 말투는 덤이다.
누군가는 이은유라는 인물을 두고 일관성이 없고 목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린홈 안에서 주민들은 생존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와 각각의 임무가 주어지지만, 이은유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방랑자와도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은유가 시즌(‘스위트홈 시즌2’)을 거듭할수록 점차 그린홈의 생존 수칙에 융화되고 전면에 나서는 모습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탈과 진입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테두리를 만들어가던 청소년의 얼굴을 표현하던 고민시는 1980년 5월을 배경으로 드라마 ‘오월의 청춘'(2021)에선 위태롭지만 굳건하게 중심을 버티고 서있는 청년을 묘사해낸다. 재밌는 지점은 ‘스위트홈’에서 으르렁거리던 남매였던 고민시와 이도현이, ‘오월의 청춘’에서는 유독 가슴 한켠이 사무치게 아려오는 그리운 사랑을 묘사한다는 것. 하지만 이질적인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1980년대, 그 시대를 살아냈을 것만 같은 황희태(이도현)와 김명희(고민시)만이 남아있다.
김명희는 서글서글한 미소와는 달리 ‘쌈닭’이라고 불릴 만큼, 당돌한 성격을 지닌 간호사다. 가난하지만 굳세고, 누구보다 간호사로서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는 단호한 인물이다. 고민시의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한 장면을 꼽아보자면, 뭐니 뭐니 해도 친구 이수련(금새록)을 대신해 선자리로 향하던 신일테다. 황희태가 김명희에게 반하던 순간이기도 한 이 장면을 빼놓고 ‘오월의 청춘’을 이야기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뛰어가는 행동파적인 면모와 목에 있는 스카프를 풀어내 피가 난 아이의 팔에 묶어주는 거침없음은 고민시라는 배우에게 단번에 눈길이 가도록 한다. 또한, 고민시는 ‘5월의 청춘’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계급과 시대가 갈라놓은 두 사람의 새벽녘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과도 같은 사랑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손에 꽉 움켜쥔 찰나에 깨져버린 희태와 명희의 사랑 말이다.
그런가 하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2023)에서는 짙게 바른 립스틱에 눈두덩이를 가득 채운 강렬한 색감의 아이섀도, 길고 가늘게 뺀 눈썹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고 다니는 고옥분 역을 맡으며 연기경력 N년차의 선배들 사이에서도 자신만의 인장을 남겼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밀수’는 해녀인 조춘자(김혜수)와 엄진숙(염정아), 장도리(박정민)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하다가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스파이로서의 모습은 통쾌한 포인트 중 하나다.
특히, 이장춘(김종수)와 장도리가 뒤에서 서로의 잇속을 챙기던 상황을 뒤집기 위해 덫을 놓는 장면에서 고민시가 왜 대세 배우인지를 입증해내기도 했다. 극 중에서 강옥분은 “오빠 내가 죽일 년이야. 나도,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면서 장도리를 곤란에 빠지게 하거나, 이장춘이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해녀들을 상어가 있는 바닷속에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 논개 작전을 펼치는 장면은 ‘밀수’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무엇보다 고민시는 ‘밀수’를 통해 제44회 청룡영화상, 제28회 춘사국제영화제, 제24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서 신인여우상을 석권하기도 했으니 그녀의 연기력을 칭찬하기란 말하기 입 아플 정도다.
2017년 SBS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로 데뷔한 고민시는 올해로 6주년을 맞았다. 그녀는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중이다. 물론 데뷔 몇 년 차까지를 신인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는 다소 모호한 지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고민시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해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호인 예담처럼 나아가는 중인 고민시는 금세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까.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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