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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의 비수기 11월에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이 12일 자정까지 누적 관객 716만명을 기록한 가운데 인상적인 몇몇 장면이 12·12 군사 반란을 어느 정도 사실대로 구현했는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기사는 영화의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음.)
11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서울의 봄’은 지난 8~10일에만 150만 279명 관객을 동원하며 누적 관객 수 700만을 돌파했다. 이는 개봉 첫 주말인 지난달 25~26일에 영화를 찾은 관객 수(149만여명)를 넘어선다. 이미 손익분기점(460만명)은 뛰어넘었고 ‘1000만 영화’로 발돋움할 고지에 올라선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9시간을 묘사한 영화다. 등장인물과 부대 명칭 등은 가명을 썼지만 사실에 입각한 작품이다. 이와 관련해 김성수 감독은 “관련 기록을 최대한 많이 접한 후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면서도 “각색할 때는 재미를 위해 허구를 더했는데 사실이 몇 %인지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섞였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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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좌천 앞두고 반란 모의=5공 전사(前史)·과거사위 보고서·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당시 9사단장)은 친구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이 “10.26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을 체포할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정 계엄사령관이 전 전 대통령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고 하자 개각 전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 ‘은신’=기록에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총소리가 들리자 피신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반군과 막아야 할 진압군 모두 한동안 그를 찾고자 백방으로 나섰다. 이후 영화에서처럼 반란군 공수부대가 노 장관의 신병을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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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중령의 전사=국방장관의 행방이 묘연했던 밤 11시40분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반란군을 막고자 인천에 있던 9공수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인다. 그러자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이 특전사령관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이후 중령 추서)은 상관인 정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전사했다. 영화에서 배우 정해인이 연기한 오진호 소령이 바로 김 소령이다. 김 소령은 이후 국립서울현충원 29번 묘역에 안장됐다. 영화 속 오진호를 사살한 박수종(이승희)은 박종규가 모델이다. 영화가 묘사했듯 김오랑 중령과 박종규는 관사 위 아래에 각기 살며 부부끼리 절친한 사이였다. 박종규는 육군본부 정보처장을 거쳐 56사단장 자리까지 올랐다.
◇반군의 국방부·육군본부 점령=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1공수여단은 13일 새벽 1시52분 국방부를 접수하고 새벽 2시15분에는 육군본부까지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박 준장은 이와 관련해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폭주를 막고 서울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며 “장태완이가 막 날뛰면서 청와대를 보고 총을 쏘라 그러고 장군들한테 탱크로 뭉개버리겠다고 욕을 하고 그랬다”고 jtbc를 통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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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9사단 병력 남하 지시=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구국과 혁명을 강조했지만 이들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반란군의 동선을 보면 영화에서처럼 노 9사단장은 실제로 서부전선 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인다. 최전방에서 북한을 방어하던 9사단 병력은 13일 새벽 3시3분 구파발 검문소를 통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과 대치하는 병력을 빼돌려서라도 반란을 ‘반정’으로 만들겠다던 신군부의 의지와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재현 국방장관·윤성민 참모차장 ‘전투 중지’ 명령=정 특전사령관이 서울로 불러들인 9공수여단과 노 사단장이 빼돌린 병력이 서울에서 맞붙을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은 윤성민 참모차장이 ‘수경사 전투 중지’를 명령하며 허무하게 끝났다. 영화에서는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전 보안사령관)과 정우성이 분장한 이태신(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광화문에서 바리케이트를 둔 채 대치하는 장면을 그리지만 이는 ‘극적인 조미료’다. 실제로 장 수도경비사령관은 수경사 병력을 연병장에 집결시켜 광화문을 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노 국방장관이 상황 종결을 명령한 뒤 사령부를 떠나지 못한 채 새벽 4시17분 반란군에 연행된다. 장 수도경비사령관이 홀로 행주대교에서 공수부대의 진출을 막는 장면도 허구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총격 장면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치열한 전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망자 공식 기록은 3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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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의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사후 재가’=진압에 성공한 전 보안사령관과 반란군은 13일 최규하 대통령에게서 정 계엄사령관 체포를 승인받는다. 영화에서는 최한규 대통령이 재가 서명 아래에 시간을 써넣으며 “사후 결재”라고 대사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는 김영삼 정부 때 이뤄진 전두환·노태우 구속 및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중요한 판결 근거로 활용된다. 현장에 함께 있던 신현확 국무총리가 최 대통령의 이 같은 행동을 증언했고 1996년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의 유죄를 판결할 때 주요 증거로 인용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전두환이 12월12일 6시20분 경 국무총리 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체포 재가를 요청하였을 때 대통령이 묵시적으로라도 이를 승낙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오히려 이를 거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며 “대통령이 12월13일 새벽 5시10분경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체포되고 반란을 저지 또는 진압하려는 장성들이 제압된 후에 이뤄진 것으로 이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헌법질서 아래에서는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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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성공 후 기념사진 촬영과 ‘출세 가도’=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보듯 전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반란군 일당은 보안사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대통령에 오르는 전두환·노태우는 물론 1군단장 황영시는 감사원장에 임명된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국방부 장관을, 1공수여단장 박희도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다.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은 국회의원을 지내게 된다. 수경사 소속의 30경비단장이었던 장세동 대령, 합동수사본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과 합수부총무처장 허삼수 대령은 청와대에 입성한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허문도와 더불어 ‘3허’로 불린 5공화국 실세로 손꼽혔다. 전두광이 대통령 최한규에게 계엄사령관 체포 재가를 받을 때 동행하는 임학주(이재윤)는 이학봉이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을 역임했다.
이들은 대법원의 판결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12·12를 ‘혁명’이라 칭한다. 박희도 당시 1공수여단장은 “사전에 계획적으로 했다는 건 정치적으로 뒤집어씌우는 것”이라며 “(12·12 군사반란은) 합수본부장(전두환)이 전직 대통령(박정희)을 살해한 살해현장에 대한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우연한 사건이지. 이것은 절대 쿠데타가 아니다”라고 매체를 통해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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