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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발진 아니란 증거 내세요”…운전자가 짊어진 ‘입증 책임’ 내려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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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도 관심보인 ‘디스커버리’…확대되면 급발진 재판도?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를 충분히 고민해볼 시점이 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4월 국회 본회의)

법무부와 사법당국에서도 특허소송과 관련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는 도입 논의가 특허소송에 한해 이뤄지고 있지만 논의가 확대될 경우 민사 소송 전반에서 상대방에게 증거를 요청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영미법권 소송법상 제도인 디스커버리 제도는 본격적으로 소송에 돌입하기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사건과 관계있는 증거자료를 청구하고 교환하는 절차다. 양쪽이 필요한 증거를 숨기지 않고 모두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의 비대칭에 따른 피해를 막고 쟁점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다. 증거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거나 훼손한 경우에는 패소 판결까지 받을 수 있다.

국내 민사소송에서 증거를 채택하고 제출하는 과정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디스커버리 제도에서는 양 당사자가 필요한 증거인지를 결정해 서로 제출을 요구하지만 우리나라 소송체계에서는 증거 채택 권한이 재판부에 있다. 민사 소송을 내면 양측이 필요한 증거 목록을 제출하고 이 가운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증거를 재판부가 채택하는 방식이다.

소송 당사자가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을 때 대응도 다르다. 국내 민사소송법에도 법원이 자료 제출을 명령했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불응하면 자료제출을 신청한 쪽의 주장을 진실로 인정할 수 있는 조항이 있지만 적용되는 사례가 거의 없다. 소송 상대방이나 제3자 측에서 자료가 없다고 잡아뗄 경우 해당 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소송 당사자가 증명해야 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석열 정부 첫 특별사면인 '8·15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를 발표 하고 있다.  이번 특별사면 대상자는 중소기업인·소상공인 등 서민생계형 형사범, 주요 경제인, 노사관계자, 특별배려 수형자 등 1693명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포함됐다.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윤석열 정부 첫 특별사면인 ‘8·15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를 발표 하고 있다. 이번 특별사면 대상자는 중소기업인·소상공인 등 서민생계형 형사범, 주요 경제인, 노사관계자, 특별배려 수형자 등 1693명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포함됐다.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과거에 소송 당사자가 민사 소송과 함께 동시에 형사 고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배경이다. 형사 고발을 하면 검찰이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청구를 통해 수사한 결과로 사실을 확인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경 수사권 조정에 이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으로 검찰의 기능이 줄어들면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동훈 장관의 국회 발언도 이런 지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에도 특허소송을 넘어 일반 민사소송에까지 디스커버리 제도가 확대 도입될 경우 사법 체계 전반에 미칠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급발진 등 자동차 결함 문제의 책임을 따지는 소송에서 기업이 설계도면을 포함해 설계를 변경한 이유나 내역 등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평등하게 공유한다는 장점과 달리 방대한 자료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용 부담이 덜한, 돈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

이세정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디스커버리센터 소속)는 “국내 소송에서는 불리한 증거를 공개할 의무가 없고 증거 조사를 법원이 하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정확히 요구해야 하고 일부 증거만 채택되는데 미국에서는 관련 자료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며 “디스커버리 제도는 정보가 편재되지 않고 평등하게 얻을 수 있게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약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한 장관도 4월 국회 본회의 당시 “사법적 역량이 결국 돈의 차이일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걱정된다”고 언급했다.

국내 사법당국에서는 도입 가능한 디스커버리 제도를 연구 중이다. 대법원이 2015년 구성한 ‘사실심 충실화 사법제도개선위원회’에서 한국형 디스커버리제도에 대해 논의를 진행한 데 이어 법원행정처가 2021년 ‘디스커버리 연구반’을 꾸렸다. 연구반은 지난해 10월 국내 도입 및 정착 방향을 논의하는 등 제도 법제화를 추진 중이다.

“기술 유출될까 봐”…’韓 디스커버리’ 도입 움직임에 업계 예의주시

한국형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도입 움직임을 두고 산업계가 개정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당하기도 하는 만큼 제도 도입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영업비밀 보호 측면에서 명확한 보완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서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크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특허권 침해 소송이 빈번해지면서다. 2021년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을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주무부서가 소부총괄과였다가 반도체과로 바뀐 것도 이런 상황이 반영된 조치였다.

업계에서 염려하는 지점은 개정안에 포함된 전문가 사실조사제도다. 기업이 자료를 선별해 내놓는게 아니라 외부인에게 공장을 열어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술 유출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단 기술이 유출되면 손해를 돌이키기 어렵다”며 “최근 기술 유출 사고가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 공장을 다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면 핵심기술까지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개정안을 추진하는 특허청과는) 입장차가 있다”고 말했다.

첨단기술이 국가전략산업화하는 가운데 해외로 업계 노하우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이른바 ‘특허 괴물’로 불리는 미국의 특허전문회사(NPE)가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않고 표적을 넓히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미국 내 한국 기업의 NPE 분쟁 건수는 2019년 90건에서 지난해 126건으로 늘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장의 장비, 재료, 배치도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노하우라 경쟁사가 알게 될까 봐 일부러 특허조차 내지 않는 경우가 있을 만큼 보안에 심혈을 기울이는데 공장 문을 열라는 것은 이런 그레이존에 있는 영업비밀이 누출될 우려를 감수하라는 것”이라며 “자기 공장을 남이 들여다 보는 것을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만 분명하고도 강력한 증거 제시 제도를 통해 분쟁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선 업계에서도 개정안 도입 취지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2019년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로 미국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제소한 것도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가 한국보다 강력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국내 기업간 소송이 해외 원정으로 번지면 시간과 비용을 유출하는 동시에 국격에도 금이 간다는 지적을 쉽게 흘려들을 수도 없다.

장기 소송을 감내할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계에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대한 찬성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7~2021년 중소기업의 기술유출·탈취 피해금액이 2827억원에 달하지만 피해기업의 75%가 증거 등 입증자료 부족으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외국 기업의 특허 소송이 남발하지 않도록 보호 조치를 마련하는 묘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개정안 도입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소송이 빈번해지면 중견·중소기업은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며 “적용 범위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개정안을 보완해 행정상 번거로움을 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대형 로펌들 이미 ‘준비’완료

대형 로펌들은 한국형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도입과 관련, 관련 조직을 갖추고 대응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디스커리비 제도가 법제화한 미국의 경우 민사소송이 발생하면 본격적인 소송에 앞서 ‘사전협의→법원의 절차지정명령→당사자 주도의 요구개시→전문가 증언 공개→변론 전 증거 공개’ 순으로 디스커버리에 해당하는 5단계를 거친다.

사전협의 단계에서는 양측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만나 증거 자료와 관련해 의견을 조율하고 다툼이 있는 부분을 확인해 구체적인 계획을 법원에 제출한다. 제도상 법원의 개입을 최소화하도록 규정돼 양측 당사자가 어떤 형태로 정보를 제출할지, 해당 정보가 삭제되지는 않았는지, 사생활 등 비밀과 관련해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지 등을 직접 논의한다.

법원이 당사자가 제출한 계획을 참조해 자료의 범위와 절차 완료 시점 등이 담긴 명령을 내리면 증거수집 절차가 시작된다. 소송 당사자의 요구에 따라 상대방 또는 제3자가 증거를 제공해야 하며 대상 증거에는 문서, 증언녹취, 질문서, 신체·정신감정, 자백 요구 등이 포함된다.

대리를 맡은 변호사는 수집된 방대한 증거를 모두 검토해 재판에 필요한 증거를 추려낸다. 개인간 소송에서는 증거가 많지 않지만 기업이 엮인 소송이라면 10년 이상 근무한 직원들의 노트북이나 휴대폰 기록까지 전부 검토한다.

김용상 법무법인 율촌 외국변호사는 “포렌식 등의 방식으로 전자문서 수집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방대한 양의 문서를 모으면 변호사들이 일일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한다”며 “어떤 문서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변호사 수임료가 시간당 매겨지면서 디스커버리가 미국 소송에서 가장 비싸고 오래 걸리는 절차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검토 과정이 마무리되면 법정에서 증언할 전문가를 상대방에게 공개한 뒤 재판에 근접한 시점에 법정에서 사용될 증거를 공개한다. 다만 디스커버리 절차를 마치고 실제로 소송에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디스커버리 절차를 거쳐 실제 재판까지 진행되는 경우는 대략 10% 미만”이라며 “증거 검토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명백히 드러나면서 승소 가능성이 낮은 쪽이 소 취하를 원하거나 합의금을 제시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전했다.

국내 대형 로펌들은 이미 제도 도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150명 이상으로 꾸려진 ‘리걸테크팀’에서 디스커버리 업무를 맡는다. 법무법인 광장·태평양·세종·율촌·화우에도 외국 변호사를 주축으로 한 대응 조직이 있다. 이들은 ‘LG화학-SK이노베이션 배터리 소송’처럼 국내 기업이 해외 분쟁을 벌이는 사건에서 대리를 맡는다.

법무법인 지평은 ‘디지털 포렌식팀’에서, 대륙아주는 국제팀과 데이터과학연구소에서 디스커버리 관련 사건을 맡는다. 바른, 동인 등은 전문 조직 구성을 고민 중이다.

박환성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인력 역량을 갖춘 대형 로펌이 주로 수임하게 될 것”이라며 “현재 기업 소송을 대부분 로펌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상 변호사도 “아무래도 대형 로펌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시간과 비용이 절대적으로 소모되는 제도라 투입 인력이 많은 곳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디스커버리 절차가 보편화되면 데이터 검토 과정에 전문성을 가진 변호사가 가격 경쟁력을 갖고 영역을 확장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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