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맏딸·희생적인 부모·이민자 차별…”한국인 공감 요소 가득”
“‘인디아나 존스’·’스파이더맨’ 등 경쟁작 부진도 영향”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북미에서 흥행 쓴맛을 보고 있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이 유독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으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4일 영화 흥행수입 집계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엘리멘탈’은 지난 2일(현지시간) 기준 미국과 캐나다에서 약 9천370만달러(1천224억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개봉 첫날에만 3천500만∼4천만달러를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제 오프닝 기록은 1천180만달러(약 378억원)에 그쳤다.
순수 제작비로 2억달러(2천617억원)가 투입되고 마케팅 비용으로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쓴 점을 고려하면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분위기다.
그동안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비롯해 ‘월-E'(2008), ‘업'(2009), ‘인사이드 아웃'(2015), ‘코코'(2017), ‘소울'(2020) 등 수많은 흥행작을 쏟아낸 디즈니·픽사는 애니메이션 명가 이미지에도 상처를 입게 됐다.
그러나 ‘엘리멘탈’은 홈그라운드인 북미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승승장구 중이다.
개봉 초기에는 일일 박스오피스에서 3∼4위 언저리에 머물렀지만, 점차 역주행하는 양상을 보이며 열흘째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개봉 20일째인 전날까지 누적 관객 수 232만여 명을 동원했다. 매출액은 230억여 원으로 전 세계에서 미국, 중국 다음으로 많다.
CGV가 관람객만을 대상으로 산정하는 ‘골든에그지수’가 98%, 영화 애플리케이션 왓챠피디아 평점 3.9점을 기록하는 등 관객들의 평가도 좋은 편이다.
‘엘리멘탈’이 유달리 우리나라 관객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이 영화에 한국인이 공감할 만한 요소가 가득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계 미국인 피터 손 감독이 뉴욕에서 이민자로 살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불, 물, 공기, 흙 등 4개 원소를 의인화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다. 불을 상징한 주인공 엠버는 원소들의 도시인 ‘엘리멘탈 시티’에서 물, 공기, 흙과 섞여 들어 살지 못한다.
관객들은 서구 사회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차별받았던 경험이 떠오르는 한편 다양성이란 메시지에 깊이 공감했다는 감상을 소셜미디어(SNS) 등에 잇따라 남기고 있다.
딸의 남자친구에게 전통 음식을 먹이는 아버지,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유난히 친절한 파마머리의 어머니,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 등 캐릭터 면면도 한국인에게 가깝게 느껴진다는 평가다.
엘리멘탈 시티에서 태어난 엠버와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정착한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도 감정이 이입된다는 반응이 다수다.
엠버는 아버지가 어렵게 일군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자신의 꿈은 포기한 채 살아간다. 이런 엠버가 ‘착한 맏딸’로 살기를 강요받는 20∼30대 여성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지만 엠버는 이른바 ‘K-장녀’로 보일 만큼 비슷한 또래의 한국 여성들이 겪었던 일종의 의무감이나 부담감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며 “각종 커뮤니티나 영화 관련 앱에서도 이런 스토리에 공감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마동석 주연의 액션 영화 ‘범죄도시 3’가 개봉한 지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새로 개봉한 작품도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는 점도 또 다른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엘리멘탈’이 처음 개봉했을 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뒷심을 발휘한다는 것은 경쟁작들이 힘을 못 쓰는 상황과 관련 있다”며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플래시’ 등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짚었다.
실제로 북미에서는 ‘엘리멘탈’과 비슷한 시기에 세 작품이 연달아 개봉해 관객을 싹쓸이했지만, 국내에서는 세 작품 모두 한 차례도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윤 평론가는 ‘엘리멘탈’이 현재 상영작 중 여러 세대가 부담 없이 볼만한 거의 유일한 영화라며 “그간 다소 철학적이던 픽사 작품과 비교하면 보편적이고 말랑말랑한 이야기인 데다 전체 관람가란 점도 흥행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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