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곽부성 주연…영상미 뛰어나지만 스토리는 부실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한밤중 술에 취해 과거를 회상하던 남강(량차오웨이 분)이 풀밭으로 피아노를 끌고 나온다.
담배를 문 채 피아노 위에 일렬로 위스키병을 올려놓은 그는 사격 연습이라도 하듯 총을 마구 쏴댄다. 병들은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난다.
이것으론 분이 덜 풀린 모양인지 피아노 건반에 기름을 붓더니 불까지 붙인다. 그리곤 위스키 한 모금. 활활 타오르는 피아노를 아련하게 바라볼 그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비친다.
웡즈광 감독이 연출한 ‘풍재기시’는 요즘 보기 드문 스타일리시한 홍콩 누아르다.
빠른 화면 전환과 화려한 편집, 스크린을 꽉 채우는 클로즈업은 머리가 어질할 정도다. 빛과 색, 음악도 대담하게 사용해 감각적인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홍콩 영화 사상 가장 많은 3천800만 달러(약 501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작품답게 1960년대 홍콩의 모습도 생생히 구현됐다.
여기에 량차오웨이(梁朝偉·양조위)와 궈푸청(郭富城·곽부성)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를 데려다 맞춤한 배역까지 맡겼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폼’을 잡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은 탓인지 스토리는 영상미만큼의 힘이 없다.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소리를 끄고 틀어놓으면 근사한 분위기를 낼 만한 영화이지만, 주인공들의 삶에 빠져들어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닐 듯하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복잡하기도 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을 장악하려는 경찰 남강과 뇌락(궈부칭 분)의 일대기를 그렸다. 주인공이 두 명인 데다 중간중간 두 사람의 과거와 홍콩의 근현대사까지 플래시백으로 나온다. 이들을 둘러싼 다른 캐릭터도 많은데, 나중엔 누가 누구의 편인지 헷갈릴 만큼 인물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남강과 뇌락은 돈과 권력을 좇는 잘생긴 경찰이라는 점만 닮았다.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 남강은 똑똑한 데다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다. 반면 뇌락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적 구두닦이부터 인력거꾼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어쩌다 두 사람은 홍콩의 범죄조직에서 상납금을 받는 사업을 함께하기 시작한다.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이들은 최고위직 경찰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갈수록 뇌락의 욕망이 선을 넘고, 남강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형제이던 둘은 어느 새 적이 된다.
플롯만 보면 언뜻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아이리시맨'(2019)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풍재기시’는 그렇게 친절하게 스토리를 풀어내지는 않는다. 감독이 화면으로 펼쳐낸 조각 조각의 정보를 조합해 이해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누아르 장르에서 살 떨리는 서스펜스는 영상미만큼 중요하다. 총격전이나 액션신도 좋지만, 인물 간 고도의 심리전도 못지않게 필요한 요소다. 하지만 이 영화는 캐릭터의 ‘멋짐’과 자신이 얼마나 영상을 잘 찍고 편집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급급하느라 서스펜스와 심리전을 모두 놓쳤다.
량차오웨이가 ‘무간도’ 이후 21년 만에 주연하고 처음으로 궈부칭과 호흡을 맞춘 영화라 아쉬움은 더 크다.
오는 5일 개봉. 144분. 15세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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