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JTBC)의 돌풍이 매섭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레지던트에 도전하는 차정숙(엄정화)을 응원하는 와중에, 깔깔 웃음이 터진다. 재미의 8할은 엄정화의 공이다. 매 순간 표정이 다채롭고 감정 표현이 풍부해 시청자를 강하게 몰입시킨다. 김병철, 박준금, 김미경 등 몸에 꼭 맞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호연도 한몫한다.
극본도 뛰어나다. 원작이 없고, 신인 작가의 작품인 데 비해 탄탄하고 사실적이다. 의료계에 대한 고증도 잘된 편이다. 모든 인물이 극단적이지 않은 이기심으로 무장한 것도 자연스럽다. 극의 진행 방식이 독특한데, 두 수 앞질러 간 결과를 미리 보여주고 황당하다고 느낄 법한 순간에 디테일을 채워간다. 가령 차정숙이 레지던트가 된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그사이의 우여곡절을 보여준다. 아들과 선배가 사귈 것이 예상될 즈음 느닷없이 둘의 애정 장면을 끼워 넣는다. 이런 두괄식 진행은 기존 드라마 전개를 지루하게 느낄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황당하다고 불평할 시청자에게 개연성의 틈을 메워준다. 흐름이 한결 경쾌하고 신선하다.
<닥터 차정숙>은 전업주부 여성의 사회생활 도전기로 어쩌면 일일드라마 등에서 종종 보았던 ‘줌마렐라’ 스토리에 가깝다. 하지만 특별한 점이 있다. 흔히 ‘줌마렐라’ 성공기에서는 주인공의 숨겨진 재능이 사업적으로 발견되거나 새로 연인이 되는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즉 평범한 전업주부에서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하기 위한 지렛대로 상상되는 것이 운과 남자였다. 반면 차정숙은 새롭게 재능이 발견될 필요도 없고 남자의 도움도 필요 없다. 차정숙은 의대를 졸업했고 인턴까지 마쳤지만 육아로 경력이 단절됐다. 그가 전문의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레지던트 과정에 도전해 마칠 수 있는 각성과 동력이다. 드라마는 차정숙의 각성을 위해 생사를 넘는 계기를 던진다. 이보다 더한 계기가 어디 있으랴! 차정숙은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간 이식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 남편이 간을 주지 않는다. 시모의 반대를 핑계 삼았지만 남편은 동료 의사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다. 가까스로 살아난 차정숙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기로 한다. 처음에는 과소비로 분풀이를 해보았으나 1천만원을 써도 공허함이 가시질 않는다. 20년간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신의 욕망도 잊고 살았는데, “너는 공부를 제일 좋아했다”는 친정엄마의 말에 각성하고 레지던트 시험에 도전한다.
혹자는 의아할 것이다. 고학력 전업주부야 꽤 있다지만, 의사인데 전업주부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아니, 왜? 전업주부의 경제적 조건이 뭘까. 일단 남편 소득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불충분하면 전업주부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민층일수록 생계형 맞벌이가 많고, 중상류층일수록 전업주부가 많다. 남편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일 때, 맞벌이가 이득인지 따져보게 된다. 엄마의 역할을 외주했을 때 드는 비용, 세금 및 건강보험 등 외벌이에 유리한 각종 공제 혜택, 여자의 직장 생활을 위한 품위 유지비 등을 상쇄하고도 여자의 소득이 높을 때, 맞벌이를 택하게 된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이 맞벌이를 택하지 못했던 이유도 “시터 이모님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소득이 높으니까 당연히 맞벌이를 택하지 않을까. 여기서 변수가 있다. 남편이 고소득일수록, 여자가 고학력일수록 여자의 소득이 상쇄해야 할 문턱이 점점 높아진다. 특히 중상류층 가정의 엄마 역할이 단순히 보모 역할이 아니다. 드라마 <시크릿 마더> <스카이 캐슬>에서 보았듯이, 자녀를 자신이 속한 중상류층의 일원으로 재생산하는 일은 고도의 노동이라서 외주할 수 없거나 외주 시 너무 큰 비용이 든다. 이런 이유로 의사임에도 전업주부를 하는 이들이 생긴다. 드라마에서는 “몇푼이나 번다고. 의사 며느리가 머리 좋아서 살림도 잘하고, 손자도 의대 보냈으니 알뜰하게 뽑아 먹었다”는 말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하고 자녀 교육의 책임이 여전히 여성에게 전가되는 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여성의 자존감과 자아실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잔혹하고 징그러운 불평등의 덫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경력 단절이나 ‘유리 천장’ 등 성차별 문제가 전문직 여성이라 해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회를 바꾸지 않는 한,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전문직 여성이 된다 해도 성차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드라마는 그래도 희망적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온 세월을 후회하고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것이 아니라, “백세 시대에 오십이면 청춘이지!”라 외치는 46살 차정숙과 그를 연기하는 55살 엄정화를 통해 ‘인생 2모작’이 헛구호가 아님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백살이 자정이라면, 오십살은 겨우 정오가 아닌가. 오후 일과를 시작할 때이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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