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열악한 집에서 죽어가던 백구 45마리. 거기 두었어도, 울산시 보호소로 갔어도, 아마 다 별이 됐을 녀석들이 벚꽃을 보고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사진=남형도 기자 |
이 기사는 쓰느라 밤을 새우겠단 예상을 했었다. 3월 초,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때부터.
73세이고 유기견을 살린 지 20년이 됐단다. 부산 ‘똘이네 쉼터’에선 유기견 100마리와 살면서, 지난해 울산 한 쓰레기 집에서 죽을뻔한 백구 45마리를 또 구조해 돌보고 있다고. 부산-울산, 1시간 반 거리를 홀로 맨날 왔다 갔다 하면서. 왼팔은 오랜 노고로 들 수도 없는 지경이 됐으나, 개들 때문에 수술도 못 하고 있다고. 그리 버텼는데 최근 울산 백구들에 파보 바이러스가 퍼졌고, 세 아이는 안타깝게 별이 되었고, 남은 녀석들 살리느라 몸이 바스라 지고 있다며.
오승미 소장님이 백구를 부르고 있다. 어렸을 때 경험 때문에, 사람을 여전히 많이 두려워한다./사진=남형도 기자 |
‘그러게 이미 힘든데 왜 구조했느냐고, 그리 영악하지 않은 선함이 속상하다’며 걱정했다. 그러다 정신 차려보니, 울산행 KTX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귀한 이름은 오승미 소장님, 이토록 빛이 안 나고 힘들기만 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어서. 멀리서 부질없이 신경만 쓰느니 만나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봄이 완연한 울산역에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와주었다. 봉사자 정승준씨(41)와 우채연씨(25)였다. 정씨는 일을 잠시 제쳐두고서, 우씨는 모처럼 쉬는 날 굳이 고단한 일을 하러 가는 거였다. 이제야 비로소 살아가기 시작한, 하얀 진돗개들을 위해서.
피 흘리던 백구 45마리 살렸다, “행복할 기회, 한 번이라도 주고 싶어서”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준비해주신 오승미 소장님./사진=무슨 라면 먹을지 고민 중인 남형도 기자 |
“어, 예.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더.”
벚꽃이 활짝 핀, 울산의 한 산 중턱 보호소에 도착했다. 다가가니 개들이 ‘웡웡’ 짖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 소장이 컵라면을 준비하다 말고 우릴 반겼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단 그는, 이미 부산 ‘똘이네쉼터’서 아이들 밥 챙기고 배변을 다 치운 뒤, 이곳 울산에 넘어와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삭발한 머리, ‘개·고양이 도살 금지’라 쓰인 흰 반소매 티, 왼팔엔 ‘팔 보호대’. 오 소장은 “팔이 아파서 요즘 핸드폰도 못 든다”고 했다. 통증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단다.
그의 곁에 두 사람이 있었다. 고양이 21마리를 돌보는 이미서 소장과, 아픈 유기견들과 사는 최금숙 소장이다. 오 소장은 “둘이 제일 고생”이라고 했다. 혼자가 아닌 셋이라 다소 안도했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오 소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서도 그는 “아침 일찍 일나서 배고플 건데 드세요, 여 김밥이 맛있다 하던데”하며 챙겼다.
지난해 여름, 오승미 소장님이 처음 마주한 백구 모습. 식중독과 피부병 때문에 상태가 많이 안 좋았을 때였다./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울산 백구들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여름, 경매로 나온 집을 보러 갔을 때였다. 강아지가 입구에 나오는데 온몸에 피가 줄줄 흘렀단다. 좋지 않은 예감에 오 소장이 문을 열어달라 했다. 주인은 거부하다 설득 끝에 문을 열었다. 집안 광경은 충격이었다. 청소도 안 된 집은 쓰레기장 같았다. 백구들 밥그릇엔 음식물 쓰레기가 있었고, 식중독에 피부병으로 피 흘리는 녀석들이 천지였다. 많은 개가 죽어 나갔단다. 그 뒤 주인은 불가피하게 떠났다. 백구 45마리만 집에 남겨지게 됐다.
지난해 여름, 처음 발견 당시 백구들 모습./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진짜 갈등이 많았어요. 내가 자신이 없더라꼬.” 오 소장이 회상했다. 이미 부산서 돌보는 유기견이 100마리였다. 게다가 울산이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왕복 3시간은 걸리니까. 그러니 주위 사람들도 “그냥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 손도 타지 않는, 입양도 어려운 큰 개들이 보호소에 가면 대부분 ‘안락사’ 될 게 뻔했다. 그래서 살리기로 했다. 이유를 묻자, 오 소장은 “애들 행복할 수 있게, 우리가 한 번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지요”라고 했다.
지난해 여름, 처음 발견 당시 백구들 모습./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백구들 거의 다 상태도 좋지 않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부병 약값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배가 불룩하고 아파 보이는 애들은 병원에 데려가 치료했다. 집도 손을 볼 부분이 너무 많았다. 비가 오면 비를 다 맞아야 했다고. 지붕을 올리고, 펜스치고, 수도도 없어서 놓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만들어야 했다. 이 소장은 “지난해 9월부터 왔으니 추운 겨울을 넘겼다”며 “눈물 난다. 진짜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만개한 벚꽃에, 눈길 줄 틈도 없이
그리 상태가 안 좋았던 백구들이 이리 포동포동해지고 예뻐졌다. 위 사진과 다른 모습이다./사진=눈에서 꿀 떨어지느라 본분을 잊어버린 남형도 기자 |
점심을 다 먹고 장화를 신었다. 세 소장님과 두 봉사자 모두 이미 분주했다. 구역별로 나눠 백구들 배변을 치우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오 소장이 아픈 왼팔을 자꾸만 쓰려고 했다. 그때마다 정씨가 “이모, 저희가 할게요”하며 한사코 말렸다. 고생하는 이를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2층에 올라가 다섯 백구부터 처음 만났다. 일억이·이억이·삼억이·사억이·오억이라고, 견사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1년 전 피 흘렸다던 녀석이 맞는지 의심될 만큼 상태가 좋았다. 하얀 털은 보들보들 윤기가 흘렀고, 움직임도 좋았다. 녀석들이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이 있었는지를. 배변을 담아 치우고 물로 시원스레 씻어냈다. 오 소장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그날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당부했다.
유기견을 돌보는 일만 20년. 이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될까./사진=남형도 기자 |
또 다른 옥상에 올라갔다. “이리와”하고 오 소장이 백구를 불렀다. 하지만 백구들은 거의 다 사람을 무서워했다. 예전 주인이 외부와 차단하고 살았던 탓이라고 했다. 오 소장이 쪼그리고 앉아, 다가오지 않는 백구를 눈높이에서 살폈다. “나이가 최고 많은 애들이에요. 10살 됐다 아입니까.” 여름 무더위와 장마가 오기 전, 지붕을 빨리 지어줘야 한다며 염려했다.
완연한 봄이었다. 만개한 벚꽃이 잘 보여 금세 시선을 뺏기곤 했다. 하지만 오 소장은 벚꽃은 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백구들만 바라보았다. 필요한 걸 더해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다가오지 못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음을 가여워했다. 이 소장과 최 소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누는 대화가 봄과는 멀어 보였다.
오승미 소장님 곁을 지키며 물심양면 돕는 두사람. 이미서 소장님(왼쪽)과 최금숙 소장님. 두 사람이 아이들에게 먹일 밥을 나누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
“요즘 언양에 벚꽃이 장난 아니란다.”(이 소장)
“벚꽃이 펴도, 폈는갑다 하고 그라지.”(최 소장)
“나 언양 간다니까, 아들이 전부 다 벚꽃 구경하러 가냐고. 그래서 나 개똥 치우러 댕기는데 그랬지(웃음). 근데 진짜 오면서도 그랬어. 힘들어도 되니까 애들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죽으면 마음이 미칠 것 같으니까, 그 생각만 들더라.”(이 소장)
파보 바이러스로 떠난…’구름이’와 새끼 두 마리
파보 바이러스에 처음 감염돼, 지난달 무지개다리를 건넌 구름이. 아픔 없는 곳에서 평온히 봄볕 쬐고 있기를.ㅊ/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뜻하지 않은 세 아이의 죽음. 3월이 그런 달이었다. ‘파보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감염병이고, 치료하지 않으면 치사율이 90%에 달한단다. 무서운 병이다. 구름이가 가장 먼저 걸렸다. 그리고 40여 마리에게 모두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장은 “제가 맡은 구역에 살던 애가 죽어서, 여기 딱 있다가 죽으니까 진짜 맘이 아팠다”고 했다. 구름이가 무지개다리 건넌 날, 봉사자도 다 같은 맘으로 울었다.
파보 바이러스로 무지개다리를 건넌, 복자와 복덩이. 더는 아프지 않기를, 안온하기를./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그리 사람을 무서워하며 도망 다니던 녀석들이, 아파서 잡아도 가만히 있었다. 물려고도 하지 않았다. 혈변이 나왔다. 보호소에 올 때마다, 백구가 죽었을까 싶어 노심초사였다.
그러니 2주 동안은 초비상이었다. 너무 많은 애들이 걸려서, 밤낮으로 울산을 오갔다. 이 소장은 “집에 가서 자니까 새벽 4시 30분, 이랬다”며 “약 먹이고 주사 맞히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하루 한 끼, 콩나물국밥만 겨우 먹을 때도 있었다. 배고파서 저혈당까지 온 날도 있었다고.
파보 바이러스 치료에 모두가 집중하던 때. 정말 고생이 많았단다./사진=우채연 봉사자님 |
그 덕분에 다행히 잘 지나갔다. 최 소장이 주먹밥을 만들기에, 다가가 물었더니 애들 약 먹이려고 한단다. 그는 “여긴 파보약, 여긴 진통제, 항생제, 따로따로 애들한테 먹인다”며 “우리 아주 저 아이들 살리려고 정성이었다. 이제 심장사상충 약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약을 먹고, 또 밥을 든든히 먹이고. 귀를 젖히고 꼬릴 흔드는 백구들을 보며 “잘 먹는 게 이리 흐뭇한 줄 몰랐다”고 했다. 그 평범한 광경이 좋은 거였다. 다만 집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 백구도 있었다. 파보 바이러스로 새끼 두 마리를 잃은 어미라고 했다. 어두운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밥을 이리 맛있게 먹는 모습도 얼마나 좋은 것일지./사진=남형도 기자 |
그러는 동안에도, 밥그릇이며 약이 든 주먹밥을 들고 동분서주 아이들을 챙기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죽음을 맘껏 슬퍼할 겨를 역시, 책임질 무게가 적당해야만 가능한 여유일 수도 있겠다고.
“아들이 웃는다, 웃어, 웃어”…소장님도 웃었다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하던 백구들도, 이리 다가오고 반길 줄 알게 되었다. 절대적인 돌봄과 사랑 덕분에./사진=남형도 기자 |
오 소장은 하루에 잠을 4시간 밖에 못 잔다고 했다. 많이 자도 5시간이다. 팔 통증이 심해서다. 인대가 다 나간 탓에, 병원에선 수술을 권유했다. 팔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치료를 못 하고 있다. 이유가 있었다.
“병원에서 수술받아도 6개월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대요. 그래서 ‘지금은 수술받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의사 말 안 들을 거면 오지 말고, 참고 살라고 하더라고요. 언젠가 축 처져 못 쓸 때가 온다고요.”
킁킁, 나랑 친하게 지내자 얘들아. 간식 없으면 글쎄요./사진=간식이 하나도 없는 남형도 기자 |
책임져야 할 이들 무게 때문이었다. 부산 ‘똘이네 쉼터’에 돌봐야 할 유기견 100마리, 울산 보호소에 백구 45마리, 일광에 고양이 15마리, 양산에 아픈 녀석 13마리 등이 있다. 오롯이 오 소장만 바라보는 아이들이다. 새벽에 일어나 믹스커피를 마시는 걸로 분주한 일과를 시작한다. 똥 치우고 신문 갈아주고 사료와 물을 주고, 서로 싸울까 걱정한다.
그래도, 또 살린다. 모른척하지 못한다. 울산에 가는 길이었다. 차도에서 반려견이 왔다 갔다 했다. 결국, 2시간을 추격해서 구조해 데려왔다. 이름을 철수라 지어주었다. 그동안 살리고 입양 보낸 유기견만 300마리가 넘는다. 한겨울 몹시 추운 날 만난 복길이는, 발견한 이가 시 보호소에 보내려던 걸 데려왔다. 입안에 피가 줄줄 흐르고 다리에 혹까지 있었다. 알고 보니, 복길이가 아프다고 주인이 버린 거였다.
차도에서 구조한 철수./사진=오승미 소장님 |
그런 녀석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차를 태워 나오려 했으나, 한사코 집에 들어가려 했다고. 오 소장은 “어디 버리러 가는 줄 알고, 자길 버린 기억 때문에 산책도 못 시킨다. 덜덜 떨다가 문 앞으로 온다”고 했다. 그걸 본 한 봉사자가 맘 아파서 울었단다.
안주 만드는 음식점 철창에 묶여 있기에 구조한 왕자, 산속에 묶여 방치돼 있던 초코, 가둬진 채 학대당했던 폴이, 모두 지금은 오 소장 덕분에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 가서 잘살고 있다. 고된 가운데 그게 유일한 보람이란다. 그날도 오 소장이 가장 기뻐하던 순간이 있었다. 아이들이 봄볕을 쐬며, 해맑게 잘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였다. 그때 행복해하며 이리 말했다.
“아들이 웃는다, 웃어, 웃어, 웃어.”
매달 고정 후원 25만원, 잔고 35만원…병원비는 300만원씩 나가
백구들 집을 물로 청소하고 있는 우채연 봉사자님. 그는 보호소를 지탱하는 운영진이기도 하다./사진=남형도 기자 |
재정적으론 많이 열악하다. 울산 백구들 있는 집은, 아직 지붕 없는 곳도 많아 공사를 계속해야 한다. 병원비가 지난 달에만 300만원이 나갔고, 약값과 주사 비용만 해도 몇백 만원씩 깨진다.
수입은 턱없이 적다. 오 소장은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후원이 매달 25만원 있다”고 했다. 여기에 기초생활 수급자라 받는 생계비 70만원을 더해 충당한다. 부족한 병원비 등은 그때마다 후원으로 겨우 메운다. 사룟값은 세 달에 120만원 정도 나가고, 월세 20만원, 전기 요금 등도 올라 살림살이가 빠듯하다. 현재 잔고가 35만원 남았다.
나와 동갑내기 봉사자이자, 오승미 소장님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정승준 봉사자님./사진=남형도 기자 |
비용을 줄이는 영역은 본인이다. 그를 위해 소비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오 소장은 “배고플 때 빵 2000~3000원씩 사 먹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낡은 차량도, 2005년부터 중고차를 사서 타기 시작해 주행거리만 30만 킬로가 넘었다.
오 소장은 “울산 백구 보호소 때문에 너무 힘들다. 포기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포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금전적인 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울산은 봉사자도 하루 한 명 정도밖에 안 와서, 일손이 부족하다. 특히 힘쓰는 일이 많아 남자 봉사자도 많이 필요하단다. 울산뿐 아니라 부산도 여전히 고민이다. 안정된 터전 하나 없어, 5년 동안 3번이나 이사 다녔다. 지금 집도 주인이 “이사 비용 줄 테니 나가라”고 하고 있다. 갈 곳이 없다.
“마지막으로 애들 그림처럼 잘 키우고 마무리하는 게 꿈이지요. 내가 나이 60살만 됐어도 걱정을 안 할 텐데, 내가 문제지요. 너무 진짜, 가슴이 아픕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존재를 모른척하지 못하는 죄(罪)로, 오로지 가능한 자기 스스로만을 깎아나가며 버티고 있는, 오 소장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벚꽃이 핀줄도 모르고 백구들만 바라보는 이를 위해, 봄이 왔다고, 또 봄이 올 거라고 홀로 사진을 남겨주고 싶었다./사진=남형도 기자 |
에필로그(epilogue).
2003년이었다. 삶이 너무 힘들어, 오 소장이 죽음을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을 잘못 만나 사기를 당했단다. 사업을 다 정리하게 됐다. ‘이래 살면 뭐 하겠노’ 싶어 차를 가지고 낭떠러지로 갔다.
그때 곁에 있던 반려견 똘이가, 그의 팔을 막 잡아당겼다. 마치 엄마 그러지 말라고, 함께 살자고 어르는 듯했다. 오 소장은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돌아와서 대리운전부터 다시 시작했다.
밤과 낮을 운전하고 다니며 헤매고 떠도는 개들이 하나둘씩 보였다고.
그때부터 유기견을 구하기 시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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