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호주전’ 수도 없이 강조하고는 일본전 염두에 둔 운영
야구를 즐기는 선수가 없다…성적에 대한 부담이 ‘독’으로 작용
(도쿄=연합뉴스) 이대호 기자 =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별리그 B조 개막전을 하루 앞둔 8일, 한국 야구대표팀 베테랑 왼손 투수 김광현(SSG 랜더스)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 야구대표팀이 소집 훈련지인 나고야에서 전체 회식을 하며 결의를 다진 것처럼 한국도 선수들끼리 비슷한 자리가 있었냐는 질문에 “성적이 나면 회식을 할 수 있다. 시작하기 전에 하면 또 말이 나올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눈치 보는 게 일상”이라며 농담처럼 웃고 마무리했어도,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쫓기고 있는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말이었다.
먼 이국땅에서 대회를 앞두고 선수단끼리 화합하기 위해 외부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이강철호는 B조 첫판인 호주전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팀 주장 김현수(LG 트윈스)와 왼손 투수 양현종, 외야수 나성범(이상 KIA 타이거즈)이 나선 대회 전 공식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어떤 질문이 나와도 “호주전에서 승리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1라운드 통과의 분수령인 호주전에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밝힌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모든 질문의 답이 ‘호주전’으로 귀결되고, 대표팀이 목표로 삼았던 4강에 진출해 미국으로 가면 어떤 점이 기대되느냐는 물음에도 ‘호주전’을 말한 건 그만큼 선수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2013년과 2017년 WBC에서 두 번 연속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한국 야구는 이번 대회를 야구 인기 회복의 기회로 삼았다.
2년 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노메달(4위) 수모를 반드시 씻겠다는 각오로 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인 토미 현수 에드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까지 대표팀으로 선발했다.
선수가 태극마크의 무게를 스스로 느끼고 대회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기본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은 대회를 시작하기 전부터 ‘위기의 한국 야구를 구해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까지 떠안았다.
도쿄 올림픽에서 껌을 씹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적 취급을 받은 강백호(kt wiz)의 사례를 지켜본 대표팀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느꼈을 압박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호주와 일본에 연전연패한 이번 대표팀의 부진 원인은 한둘이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처럼 세계 무대와 격차가 더 벌어진 것도 인정해야 하고, 대회 준비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부담감에까지 짓눌리자 선수들은 원래 기량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코치진 역시 마찬가지다.
WBC 1라운드 B조 편성이 발표된 직후부터 9일 호주전에 ‘올인’하겠다고 말했던 이강철 감독은 바로 다음 날 열린 일본전에 대한 부담 때문에 뒤를 남겨두는 선수 기용을 했다.
가장 컨디션이 좋은 투수를 아낌없이 호주전에 투입해야 하는데도 일본전에서 패했을 때 후폭풍에 대한 우려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호주전 7-8로 패해 벼랑에 몰린 처지에서 일본전에 나섰고, 마운드가 무너지며 4-13 패배 수모를 당했다.
우리를 제외한 다른 나라 선수들은 대회를 즐기는 느낌이다.
물론 그들도 성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을 수야 없지만, 축구로 치면 월드컵의 위상을 가진 WBC에 출전해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선수들과 경기하는 것 자체로 즐거워한다.
사실 좋은 성적을 냈던 2006년과 2009년 WBC 때도 한국 선수단은 야구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국민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비장감이 넘쳤다.
기량이 충분하다면 비장한 각오가 성적으로 이어졌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번 대표팀에는 독이 됐다.
4b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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