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이지혜 디자인기자 |
“임직원뿐만 아니라 1~3차 협력사, 은퇴 직원, 고객사까지 모두 단속하려면 현실적으로 여력이 부족합니다.”
17일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기술 해외 유출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중국을 비롯한 주요 경쟁국가에서 국내 반도체 기술을 노리고 전·현직 임직원들에게 접근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으나 지나치게 수비 범위가 넓어 단속 여력이 부족하다는 한숨이다. 적발되더라도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어서 막대한 이익이 뒤따르는 기술 유출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박진성 부장검사)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A씨(47)등 2명과 기술 유출 브로커, 세메스 협력사 대표 등이 산업기술보호법 및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 혐의로 전날 구속 기소됐다. A씨는 퇴직 후 세메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 핵심 도면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이들은 중국인 브로커와 함께 1200억원가량을 챙겼으며, 피해 예상액은 수조원대에 달한다.
반도체 기술 유출은 한국 반도체 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대기업의 보안체계가 강화되자 거래 관계에 있는 협력사나 전직 임직원들을 노리고 기술자문 등의 명목으로 거액을 제시하며 핵심기술을 탈취한다. 은퇴한 직원이나 관계자까지 미처 눈이 닿지 않는 허점을 노렸다. 수출이나 인수합병시 정부 신고·허가를 거쳐야 하는 국가핵심기술도 몰래 빼돌리거나, 베낀 기술로 제품을 개발해 경쟁국에 되판다.
국내 기술의 해외 유출은 꾸준히 증가세다. 대검의 산업기술 해외유출 적발건수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5년간 112건, 국가핵심기술 36건이 유출됐는데 디스플레이·반도체 부문만 50건에 달한다. 지난해에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직원이 반도체 핵심기술을 유출하다 적발됐으며, 또다른 직원은 인텔로 기술유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
업계는 기술 유출이 잇따르는 이유로 낮은 처벌수위를 첫손에 꼽는다. 현행 산업기술유출방지법에 따르면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하는 자는 3년 이상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벌금을, 산업기술은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사용하게 할 목적’이라는 단서조항이 있어 이를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실제 기술 유출의 처벌 수위를 보면 대부분 집행유예나 낮은 수준의 징역형에 그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관련 판결은 1심 재판 기준 집행유예가 39.5%에 달했다. 지난해 삼성전자 자회사의 산업기술 925개를 빼돌려 중국 수출용 장비를 개발한 협력업체 대표도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2020년에는 서울반도체의 LED 핵심기술을 유출한 전직 연구원이 징역 8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적발시 간첩죄를 적용해 12년의 징역과 벌금 1억 대만달러(한화 약 44억원)를 부과하는 대만이나, 국외 추방을 부과하는 미국, 범죄 수익을 모두 몰수하고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본에 비해 처벌 수위가 약한 셈이다. 지난해 ‘산업기술 유출방지법’ 처벌 강화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대안반영폐기되는 등 아직까지 처벌 강화는 요원한 상태다.
업계는 시급히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은퇴 임직원·협력사 등 사각지대를 중심으로 ‘한탕주의’가 끊기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은퇴한 기술자나 협력사 관계자에게 수십억원의 보상을 약속하고 접근하는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라며 “중국을 중심으로 기술 유출 시도가 지속되고 있으나 규제도 자본도 부족한 한국은 당하기만 하는 실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문가들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전반적인 처우 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영준 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과 교수는 “은퇴 직원들에게도 국가안보산업인 반도체 부문에 기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역할과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라며 “기업과 검찰, 국정원 등이 발맞춰 유출을 단속하는 한편 적절한 수준의 보상이 약속되어야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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