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한반도가 설설 끓는데 과연 몇 도까지 올라갈까요? 이러다 지구가 망하는 것 아닌가요?” 2024년 8월 경기도 여주의 수은주가 41.6도까지 올랐다. 여주는 발달장애인 청년들이 일하는 농장 ‘푸르메소셜팜’이 있는 곳이다. 살인적인 더위는 방울토마토 줄기마저 녹여버렸다. 1907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117년 만의 최고 기록이었다. 이대로라면 ‘최고기온 50도’에 도달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기후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러다 정말 인간이 멸종하는 것은 아닐까요?” 조급한 질문에 이정모 펭귄각종과학관 관장(전 국립과천과학관장)의 대답은 냉정하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결과입니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멈추든지 아니면, 우리를 포함한 현생 인류는 멸종하고 보다 나은 인류가 새로 탄생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면 됩니다. 이런 추세라면 2150년이 되면 인류가 멸종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로 특징되는 기후 위기의 끝이 인간 멸종이라니 참담하다. 시간이 125년밖에 안 남았다. 웬만큼 나이 든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어린이·청소년과 앞으로 태어날 세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현재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펭귄각종과학관장’. 2년 전 정년 퇴임한 뒤 경기도 고양시 일산 백마역 건너편 상가의 작은 사무실에 연구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 이름이 펭귄각종과학관.
그는 요즘도 어김없이 아침 8시가 되면 사무실로 출근한다. 과학 관련 원고를 쓰고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그날의 일정을 정리한다. 「한겨레」와 「세계일보」 2개 일간지에 과학 칼럼을 연재하고 한 달에 절반 이상은 지방 강연을 다닌다. 지난해 말 보름 동안 전남 신안군의 7개 면과 4개 초등학교를 돌며 환경과 과학을 주제로 강연했다. 지역주민과 면사무소 직원, 어린이가 대상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할아버지·할머니 네 분 앞에서 열강을 했다. 올해도 신안군 강연을 계획하고 있다.
“46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한 이후 다섯 번의 대멸종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행성 충돌과 화산폭발이 주된 원인이었지요. 마지막 충돌 때는 육지에서 공룡이 멸종됐고 고양이보다 큰 동물은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포유류와 조류, 특히 인간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일어난 다섯 번의 멸종이 우주와 자연 때문이었다면 현재의 위기는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후 위기의 근저에는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있다. ‘더 편리한 것,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추구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제력을, 자연은 자정 능력을 잃었다. 땅에 묻으면 토양이, 태우면 공기가, 버리면 바다가 오염된다. 대기오염에서 시작된 재앙이 수질오염과 토양오염으로 이어지고 있다. 옛날엔 남의 것을 가져가는 사람이 도둑이었지만 요즘은 버리는 사람이 도둑이다. 자연은 인간에 맞서 폭우와 폭염, 가뭄, 태풍으로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이제 ‘지구 온난화’라는 표현은 맞지 않을 것 같다. ‘지구 소멸화’나 ‘지구 멸망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정모 관장은 2023년 2월 국립과천과학관장직에서 정년퇴직했다. 그는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였다. 학교를 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5년, 서울시립과학관장 4년, 그리고 국립과천과학관장 3년 등 12년 동안 박물관장으로 일했다. 그는 “이제 남은 어공(어쩌다 공무원)은 미국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장”이라며 웃는다.
웃는 모습을 보니 그의 볼이 홀쭉하다. 최근 체중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45kg이던 체중은 5년 전 두 배가 넘는 98kg까지 치솟았다.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고혈압, 관절염이 시작됐다. ‘이러다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걷는 운동을 늘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맥주를 줄였더니 체중이 최근 72kg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정모 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0여 년 전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하는 「부키출판사」의 행사에서였다. 부키출판사에서는 사옥 확장을 기념해 몇 사람을 초대했는데 그는 기획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다른 곳에서는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장애와 관련된 책의 출간을 거절했지만 부키출판사는 흔쾌히 장애인의 삶을 다룬 「푸르메시리즈」를 출간했기에 나도 하객으로 참석했다. 당시 교수였던 이정모 관장에게 받은 인상은 ‘과학을 이렇게 재밌게 설명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과학에 대한 맛깔난 표현에 감탄했다. 과학은 학창시절부터 지루한 암기과목, 재미없는 학문이라는 내 편견은 그에 의해 통쾌하게 깨졌다.
그는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등 과학을 쉽게 설명한 책에 이어 최근 「찬란한 멸종」을 펴냈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를 물었다. “생명의 특징은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진화는 새로운 생명의 등장이지요.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누군가 자리를 비켜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멸종이지요. 흔히 멸종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새로운 생명 탄생의 찬란한 시작입니다. 현재 인간이 찬란한 멸종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과학을 전공하게 되었을까. “저는 고향이 파주입니다. 아버지가 파주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소방관이었어요. 그런데 전남 여수에 석유화학단지가 생기면서 외국계 기업이 들어왔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아버지가 지원했습니다. 6살 때 가족과 함께 여수로 내려갔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어린 시절 여수는 그에게 한려수도의 때 묻지 않은 청정자연이면서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산업시설을 밝히는 별세계로 변했다. 그곳에는 과학의 위용과 산업화로 인한 자연 파괴의 그늘이 같이 존재했다.
대학 원서를 쓰러 갔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자신은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농과대학에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너 원예에 관심 있다고 했지? 그럼 생화학(生花學)과에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듣고 얼떨결에 생화학(生化學)과를 지원하게 됐다. 그 후 대학원과 독일 유학 생활을 통해 ‘과학은 모든 것의 근원을 설명하지만 하나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유명한 ‘얼리버드’다. 과학관에 근무한 12년 동안 6시 3분에 출발하는 전철을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 7시 15분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그의 화두는 ‘어떻게 박물관 업무를 효율화하고 사랑받는 박물관을 만들 것인가’였다. “전시 기획은 제가 오기 전부터 잘해 왔으니 전문가와 직원들에게 맡기고 다른 두 토끼를 잡는 데 집중했습니다. 과학에 관심을 가진 어린이와 직장인들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흥미를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직장인에게는 특강을 기획했습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2022년 관람객이 589만 명을 넘어섰고 13개에 불과하던 과학 강좌는 현재 531개가 운영되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과학을 널리 알리는 거란다. 그래서 스스로 과학자가 아닌 ‘과학커뮤니케이터’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침대는 과학이라는 광고처럼 21세기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인문학적 교양이 중요했다면 지금부터는 과학적 사고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대중이 과학에 흥미를 갖기 위해서는 과학이 더 쉽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로마인 이야기」로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는 고대 로마와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20여 권의 역사소설을 썼다. 이 소설이 세계인의 인기를 끌면서 그리스·로마와 중세 르네상스 시대 역사에 대한 붐이 일었다. 나는 그녀가 로마 고대사와 중세사를 대중화하는 데 유명 역사학자 100명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정모 관장도 그런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그는 대학에 입학해 사회문제에 눈뜨게 된 이후 자신이 다니는 ‘연동교회'(서울 종로)에서 9년 동안 야학을 했다. 대상은 비슷한 또래의 청계천 노동자들이었다. 어쩌면 대학에서 친구가 됐을지 모르는 청년들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2년 동안 야학을 계속했다. 홀로 된 장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20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부부금슬이 좋고 부인도 그를 극진하게 대한다. 장인과 부인을 끔찍이 대하는 마음이 장애어린이로 이어졌을 것 같다.
이정모 관장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할 때 푸르메재단과 업무협약을 맺어 장애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휠체어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앴고 특별전을 기획했다. “처음에는 휠체어를 탄 꼬마들을 생각했는데 과학관 문턱이 사라지자 노인과 유모차 관람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과학은 눈으로만 관찰하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해 ‘만지는 과학관’도 열었어요. 시각장애 어린이들이 손으로 암석과 박제된 동물들을 만지며 ‘아! 표범이 이렇게 생겼구나’, ‘털이 뻣뻣하구나’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과학관 로비에 설치된 회오리모금함도 어린이들에게 장애에 대한 이해와 어린이재활병원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정모 관장을 2017년 푸르메재단의 고액기부자 모임인 ‘더미라클스’의 조찬 강연에 초대했다. 때마침 강사는 화상 장애의 고통을 이겨내고 나중에 이화여대 교수가 된 이지선 홍보대사였다. ‘삶은 선물입니다’라는 제목의 강연은 장애어린이의 재활과 장애청년의 자립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이었다.
강연을 들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이정모 관장은 1억 원 기부를 약정했다. 그리고 ‘더미라클스’의 20번째 회원이 되었다. “이지선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바로 1000만 원을 기부했어요. 그런데 어디서 이야기가 와전됐는지, 제가 1억 원 기부를 약정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더라고요. 지인들이 신문 기사를 잘 봤다고 전화했습니다. 교회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대단하다고 저를 칭찬하셨고, 친구들도 ‘너는 10년간 술값 내지 마라’며 어깨를 쳐주니 별수 있나요. 어떻게든 기부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관장은 불과 5년 만에 기부 약속을 지켰다. 월급은 대학에 다니는 두 딸을 비롯한 가족의 생활비였기에 손댈 수 없었고, 대신 강연료와 책의 인세로 기부금을 만들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으면 단독 저서 28권, 공동 저서 49권, 번역서 37권의 절반 이상을 이 기간에 썼다. “기부 약속을 지키느라 아마 인생에서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강연을 하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과학관장 업무에도 충실해야 했기에 아침 7시 15분에 출근해 기관장평가에서 매년 최고 S등급을 받을 만큼 열심히 일했어요. 돌이켜보면 푸르메재단에 약속한 ‘1억 기부’가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배움의 기회였습니다. 10개 신문에 칼럼을 쓰고 매달 책을 쓰고 강연하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거든요. 1억 원은 아깝지 않은 인생 수업료였습니다.”

이정모 관장은 “푸르메재단의 역할은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던 어린이재활병원을 짓고, 일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지던 발달장애 청년들을 위해 스마트팜을 지은 것입니다. 바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바쁘다. 신문 기고와 강연, 책 저술, 추천사, 서평 등으로 24시간이 부족하다. 그가 앞으로 과학을 보급하는 과학커뮤니케이터로서 크게 성공하길 기대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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