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국에는 조선시대 노비와 양반을 나누는 신분제가 있다. 작가 없는 방송 없다. 아예 없다. 그럼에도 방송국에서는 작가를 프리랜서로 고용하며 회사 직원으로 뽑지 않는다. 갓 입사한 신입 PD는 30년차 작가를 마음대로 자를 수 있다. 사사로운 의견으로 오랜 작가팀 전체를 하루아침에 바꾼다. 프리랜서 채용제도는 양반가의 노예계약이다.”
9년차 ‘프리랜서’ 방송작가 A씨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예능방송작가 노동환경 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에서 현장 발언에 나섰다. 토론회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와 방송작가유니온, 국회의원 연구단체인 국회 문화·예술살롱, 더불어민주당 강유정·모경종·박홍배·이기헌·이용우·최민희 의원과 조국혁신당 김재원 의원이 주최했다.
A작가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일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다 숨진 고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방송국은 작가뿐 아니라 필수 제작인력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 고용한다. 오요안나 캐스터도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도움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숨졌다”며 “저는 11살 많은 PD의 ‘고백 공격’으로 괴롭힘 당하다 잘리듯 그만 둔 적도 있다”고 했다.
A작가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MBC 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막내작가로 일하며 6개월 넘도록 매일 20분 주기로 알람을 켜놓고 잤다고 했다. “외주제작사끼리 아이템 경쟁 때문에 사건 기사가 올라오는 시간을 다른 제작사 막내보다 먼저 캡쳐해야 했다. 만약 놓치면 퇴근시키지 않거나 밥을 주지 않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이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가 방송작가에게 상시·지속적이며 종속된 업무 지시를 하면서도 ‘프리랜서’로 계약하는 일이 작가들 일상을 어떻게 흔드는지 보여주는 일면이다. 박선영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 수석부지부장은 “우리 방송작가는 카카오톡에 40초 내 답 못하면 난리가 난다. 화장실에 있으면 동료가 핸드폰을 들고 달려온다. 근무 시간을 정해놓지 않아도 그 일에 항상 얽매인다”며 “그럼에도 작가를 노동자로 인정 않는 것은 아주 오래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늬만 프리랜서’ 작가들의 노동환경은 이날 공개된 통계로도 드러났다. 한빛센터와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지난해 11월 1~17일 예능프로그램 작가로 일한 경험이 있는 방송작가 18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10명에 4명 꼴로 계약서 없이 일했다. 계약서를 전혀 작성하지 못한 경우가 36.6%(68명)이었고, 썼더라도 교부 받지 못한 경우를 합하면 총 42.5%(79명)에 이르렀다.

예능 작가들의 고용 불안정은 전체 노동시장과 견줘도 극단적으로 컸다. 현재 예능프로그램에서 일하지 않는 작가 가운데 개인 사정 탓에 자발로 그만 둔 경우는 14.7%(17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모두 비자발적으로 퇴사했다. 48.3%(56명)은 프로그램 제작 종료로 인해 그만뒀다. 14.7%(17명)는 예상치 못한 편성 변경과 폐지로, 11.2%(13명)은 노동권 침해를 입고, 8.6%(10명)는 해고 또는 계약해지 통보를 받고 로 그만뒀다.
고용보험 통계상 전 산업 종사자들은 자진 퇴사 비율이 가장 컸다. 2024년 10월 전체 고용보험 상실자 가운데 68%가 개인 사정에 의한 자진퇴사였다. 권고사직과 해고 등에 따른 비자발적 퇴사는 1.7%에 불과했다.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장은 “전체 노동시장에 비해 예능 방송작가에게 노동권 침해가 훨씬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예능작가들은 전일제에 준하거나 그보다도 길게 일했다. 이들의 1일 평균 노동시간은 9.4시간, 주당 평균 휴일수는 1.5일이었다. 박선영 수석부지부장은 “예능작가 조합원들 얘길 들어보면 시사교양 작가보다도 훨씬 사용 종속성이 강하다. 노동자성은 높고 처우는 낮다”고 했다. “저연차일수록 주요 업무가 원고나 대본이 아니라 기획, 섭외, 자료 조사, 현장 관리, 심지어는 출연자 대기실에 이름을 프린트해 붙이는 것도 작가의 일”이라며 “예능 작가 같은 경우는 10년 차가 넘어서 ‘세컨 작가’가 돼야 어느 정도 원고 작성에 접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작가들의 업무를 주로 결정하고 지시하는 주체(복수응답)는 메인작가(72.6%)와 제작총괄PD(69.9%)로 나뉘었다. 김 센터장은 “제작총괄 PD란 답변이 70%에 육박한다는 점은 작가 업무가 메인작가와 도급계약을 했다고 해도 제작을 총괄하는 PD 영향력이 그에 못지않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10명 중 9명 넘는 비율이 △고정된 회의와 촬영 일정 참석 의무가 있으며 △재택 중에도 업무지시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 하고 △개인 사유로 일을 못하는 날이 생기면 미리 상급자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답했다.

24시간 회사에 종속돼 일하거나, PD 결정으로 하루아침에 해고됐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응답자 B씨는 “쇼양(쇼 형식의 교양프로그램) 하는 막내들은 최저임금만도 못한, 4대 보험도 적용 안되는 근무 환경에서 24시간 내내 대기상태로 일한다. 그로 인해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얻었다”고 답변했다. C씨는 “잘하던 프로에서 메인PD 기분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잘렸다. 근무환경을 바꿔달라고 했을 뿐인데, 감히 일개 작가가 자신한테 얘기했다는 이유였다”고 했다.
정부가 방송작가 권리 보장을 목표로 마련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마련했지만, 이것이 현실에선 오히려 방송작가 권리 개선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문화체육관광부 표준계약서는 콘텐츠에 대한 ‘2차 사용료’(저작권료)를 획일적으로 명시했는데,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는 저연차 방송작가들이 오히려 법적 다툼에서 이 조항 탓에 노동자성을 부정당한다는 지적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은 예능작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계약서에 기획료 조항 신설과 현실화 △예술인 고용보험 현실화 △계약서의 의무화 △계약서 재개정을 위한 노사정 상생협의체 가동을 제시했다. 박 수석은 “‘나는 솔로’ 사례만 봐도 계약서 미작성에 대해 1차 시정요구에 이어 150만 원 과태료만 내면 모든 사안이 종결돼 솜방망이 행정처분에 그친다”며 제도 변화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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