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의 꿈’까지 불러내다니
탄핵반대 시위 나가면 내란 잔당?
민주정치는 연약 기반 위의 건축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https://contents-cdn.viewus.co.kr/image/2025/02/CP-2023-0078/image-b69ad8cf-64b6-438b-91d8-f515db5577a7.jpeg)
“1980년, 불의한 권력이 철수한 찰나의 광주에서 우리 모두가 꾸었던 꿈, 함께 사는 ‘대동세상’의 꿈은 2016년 촛불혁명을 지나 2024년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894년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한 동학농민군의 꿈은 2024년 마침내 남태령을 넘었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0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 한 대목이다. 꾸밈이 너무 많아서인가 무슨 말을 하자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용어 몇 개는 금방 눈에 띈다. ‘대동 세상’ ‘촛불혁명’ ‘빛의 혁명’ ‘동학농민군의 꿈’ 등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대동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선동의 구호다. 우금치를 넘지 못했던 동학농민군의 꿈이 마침내 남태령을 넘었다는 것도 대동세상이나 마찬가지로 갈 데 없는 대중선동문(文)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차별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평등 요구에서 비롯됐다는 말은 듣느니 처음이다. 그는 대선 당시에도 대동 세상에 대한 꿈을 역설했었다. 동학농민군의 꿈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을 좌절시키고 탄핵 심판과 내란죄 재판에 넘긴 것으로 이뤄지게 됐다는 것인 듯하다. 아니면 이제 남태령을 넘은 동학농민군이 보수세력을 밀어내고 대동 세상을 열게 될 것이라는 뜻인가?
‘동학농민군의 꿈’까지 불러내다니
어쨌든 이 사람들 정말로 ‘혁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빛의 혁명’은 또 뭔가. 무엇에든 혁명을 갖다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가진 건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집권 후 ‘촛불혁명’을 입에 달고 살더니 이 대표는 ‘빛의 혁명’이다. ‘오색 응원봉’인가를 흔들며 탄핵 찬성 시위를 하는 지지 세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다. 문 전 대통령과의 혁명 경쟁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도 혁명의 리더’라고 하고 싶은 걸까?
혁명주의자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는 게 혁명이다. 구체제를 둘러 엎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완수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혁명은 좌파의 전유물이다. 현실정치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역사적 맥락에서도 그렇다. 민주당 이 대표는 자신이 ‘빛의 혁명’을 이끌고 있다고 여기는가?
‘촛불혁명’ 대통령을 자처하던 문 전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무엇을 이뤘는가? 최저임금 수직인상?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에너지난과 비용 급상승? 과도한 친북·친중 정책? 검수완박·공수처 설치 강행과 검찰 및 국정원 수사권 경찰 이관? 조국 파동이 초래한 진영대결 악화?
‘조국’ 전 의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문 전 대통령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며 “한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10일, 한겨레). 인터뷰를 끝낸 후에 한 말이라는데 이야말로 국민 우롱 아닌가. 2심 재판에서까지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도 기어이 조국혁신당을 만들고 22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국회의원직을 누렸던 사람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비난하는 인터뷰 끝에 확정 범법자 조국에게 ‘한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다니! 국민도 같이 미안해하라는 것인가.
이 대표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다. 그의 10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공백 포함 1만1000여자, 공백제외 9000여자의 장문이었다. 2백자 원고지로는 50장 분량이다. 문 전 대통령의 취임사보다 무려 4배 가까이 많은 분량의 연설문을 44분간 낭독했다. 국정 전반에 걸쳐 정책 구상을 밝히면서 ‘대통령 취임사’를 읽는 기분이었을까? 한창 대통령 연습에 바빠 보여서 하는 말이다.
탄핵반대 시위 나가면 내란 잔당?
“대한민국은 지금 유례없는 위기, 역사적 대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예측조차 망상으로 치부될 만큼 비상계엄은 상상조차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대통령의 친위군사쿠데타’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국민과 국회에 의해 주동 세력은 제압되었지만, 내란 잔당의 폭동과 저항이 두 달 넘게 계속되며 대한민국의 모든 성취가 일거에 물거품이 될 처지입니다. 권력욕에 의한 친위군사쿠데타는 온 국민이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헌법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 중입니다.”
이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한 말인데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그에게서 듣는 기분은 아주 거북하다. “이게 나라냐”고 따지던 사람들은 누구였나? 언제부터 자랑스럽기 시작했을까? 상상조차 불가한 계엄’이라면서 민주당 김민석 수석 최고위원은 어떻게 상상 정도가 아니라 현실 상황인 것처럼 집요하게 따지고 들 수 있었나? ‘권력욕에 의한 친위쿠데타’라는 말도 이상하다.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자인데 더 무슨 권력욕이 있어 친위쿠테타를 일으켰다는 것인가?
‘내란 잔당’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에 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폭동과 저항’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서부지법에 난입한 시위대, 광화문·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과 부산·대구의 ‘탄핵반대’집회 참가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들이 내란의 잔당이라는 뜻인가? 좌파 세력들은 당연히 시위할 권리를 가졌지만, 우파 시민들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 진의는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광장을 물들이는 ‘오색 빛들’의 외침은 우리를 다시 만날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내란 잔당’이고 ‘탄핵 요구’ 세력은 애국자들이라는 의미인 모양인데, 이러면서도 “정치의 사명인 ‘국민통합’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시쳇말로 뻥을 치는가? 국민을 양극단으로 갈라놓으면서 ‘통합’을 말하는 이런 식의 궤변이 이재명표 언변인 모양이다. ‘통합’이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국민의 의식이나 인식은 통합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이해와 존중의 대상 아닌가?
민주정치는 연약 기반 위의 건축물
갑자기 “한미동맹은 우리 외교·안보의 근간”이라고 강조하는 그 낯 두꺼움에는 일개 시민으로서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언제 좌파 정치세력이 한미동맹을 그처럼 소중하게 여겼었나?
“민주주의를 공동 가치로 하는 한미동맹은 친위군사쿠데타라는 국가적 혼란 앞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우리 국민의 노력에 변함없는 신뢰와 연대를 보내주었습니다.”
마치 ‘한미동맹’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처럼 들리게 하는 이런 화법은 정치지도자라는 사람이 구사할 바 아니다. 거듭되면 거짓말이 되고 심하게는 사기성 멘트가 되고 만다.
이 대표는 그 긴 연설에서 단 한 줄도 정부의 국정운영 방해 작태를 사과하는 데 할애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법적 부담을 완화 또는 해소하는데 민주당 의원들을 상시적으로 동원한 사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반성의 말이 없었다. 의원들을 자신의 가노처럼 부리면서 세비와 제 경비 및 지원비는 국민에게 떠넘긴 몰염치도 모르는 양 했다. 이야말로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격이다.
정치의 장이 도덕 교실이 아닌 것은 맞다. 정치에서 두드러지는 측면은 권력투쟁이다. 그게 정치의 실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권력은 야수성을 가진다. 그 본성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하는데 민주주의의 민주주의다움이 있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연약기반에 세워진 건축물과도 같다.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붕괴 위기에 봉착한다. 눈 부릅뜨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책임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있다. 정치인들의 선의를 믿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도 없다.
“정인(正人: 올바른 사람)은 사인(邪人: 사악한 사람)을 가리켜 사(邪)라고 하며, 사인 또한 정인을 가리켜 사라고 한다.”(십팔사략)
중국 당나라 무종 때 재상이 된 이덕유(李德裕)가 그렇게 진언했다. 그러니 사람을 가려볼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덕목이 그때는 군주에게 요구됐으나 지금의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에게 요구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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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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