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관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충격이 큰 이유는 그가 2024년 11월에 정규 앨범 ‘지갑이 형님’을 발매했기 때문이다. 정규 앨범은 상당한 에너지가 소요되는 작업이다. 그 정도의 일을 해낼 정도라면 몸 상태가 좋을 거라고들 생각했다. 정규 앨범 발매 후엔 다양한 관련 활동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송대관도 지난 1월 19일 ‘전국노래자랑’ 출연을 비롯해 방송출연 및 봄 공연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별세 소식이 들려왔으니 충격이 더 하다.
그는 어린 시절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바느질한 포목을 시골 오일장에 내다 팔며 4남매를 힘들게 키웠다. 송대관이 가수의 꿈을 품고 상경할 당시 돈이 없어 무임승차를 할 정도의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 1967년에 ‘인정 많은 아저씨’로 서울에서 데뷔했다. 하지만 고달픈 무명 시절이 이어져 지인의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결혼한 후엔 만삭의 부인이 생계를 꾸려나갔다.
1975년에 ‘해뜰날’이 대히트하며 그의 인생에도 일약 해가 뜨게 된다. 나의 인생에도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있을 거란 믿음을 담아 송대관이 직접 작사한 곡이다. 그는 이런 식의 낙관적 인생관으로 나중에 전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았을 때도 오뚝이처럼 재기했다.
‘해뜰날’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표현한 노래가 되었다. 그때는 우리나라 자체가 낙관주의로 뒤덮였던 시절이다. 경제개발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은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넘쳐났다. 그런 분위기와 ‘해뜰날’이 너무도 잘 맞아떨어져서 웬만한 관제 건전가요 이상으로 각계의 사랑을 받았다.
일단 당시 수출한국 경제개발의 총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일부 군부대에선 ‘해뜰날’이 군가처럼 하루 종일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엔 70년대부터 ‘쨍’하고 볕이 들기 시작했고, 송대관의 인생에도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가수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극장쇼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또다시 생활고가 시작됐다. 결국 미국 이민을 선택하고 만다.
미국에서 갖은 고생 끝에 자리 잡았지만 향수병으로 인해 1988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것은 신의 한 수였다. 바로 그때부터 송대관 인생에 진짜 볕이 들게 된다. 89년 ‘정 때문에’를 비롯해 92년 ‘차표 한 장’, 98년 ‘네 박자’, 2003년 ‘유행가’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90년대에 한 많은 트로트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린 신나는 트로트의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한국 트로트계의 정점에 올랐다. 특히 태진아와 앙숙 구도를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콤비플레이를 했다. 방송에선 항상 티격태격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선후배 동료였다. 태진아가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먼저 정착한 송대관이 도우면서 한 집안처럼 가까워졌다. 둘이 함께 공연도 많이 했고, 올 봄에도 두 사람의 합동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며 500억원대 재산을 일궜다고 한다. 하지만 2013년에 부인이 부동산 투자 실패로 사기 사건에 휘말리며 모두 잃고 160억원 이상의 빚을 지게 됐다. 그 이후 70대 나이에도 젊은 가수 이상으로 행사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 절치부심했다.
이런 위기를 겪은 후에도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내가) 전공을 살려 돈 벌어서 남편을 더 빛나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안 된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오늘의 송대관이 있기까지는 내 아내가 있다. 난 그 사람의 영원한 바람막이가 될 거고, 그 사람을 위해서 뭐든지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송대관의 노래는 서민적이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거나 강렬하지는 않지만 ‘네 박자’, ‘유행가’ 이런 노래들을 들으면 왠지 푸근하고 따뜻하다. 그런 노래들로 위로를 전해줬고 동시에 ‘해뜰날’로 오랫동안 국민을 응원해줬던 국민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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