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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럽경제는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우려의 대상이다. 오랜 기간 미국과 양대 축을 형성하는 산업국가로 세계 시장을 선도했던 유럽의 위상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빅테크는 보이지 않고 화학, 제약, 자동차 등 전통적인 유럽의 주력산업 분야조차 경쟁력을 확연히 잃어가는 모습이다. 미국과의 부(富)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고 중국의 빠른 기술향상과 시장 잠식에 글로벌 시장 2인자의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
작년 말 ECB(유럽중앙은행)는 ‘유럽경쟁력의 미래(2024)’ 보고서를 통해 EU경쟁력 위기의 심각성과 그 원인을 제시했다. 지난 20년간 EU(27개국)의 경제성장은 미국보다 속도가 느렸고 그로 인해 미국과의 GDP(국내총생산) 격차는 2002년 15%에서 2023년 30%로 확대됐다. 2020년 즈음에는 중국에 2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유럽의 GDP 성장 둔화는 생산성 부진에 따른 것이며 이는 미국과의 혁신 격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유럽의 혁신 격차의 문제는 최근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이미 30년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제기된 사안이다. 당시 유럽의 학자들은 유럽의 기초과학 역량이 미국과 유사함에도 산업경쟁력에서는 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이유를 과학성과의 상업화 부진에서 찾았다.
이 문제는 유럽 혁신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진단됐고, 유러피언 패러독스(European Paradox)라고 불렸다. 그러나 과학성과의 상업화 부진 구조는 개선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었고 느린 혁신과 과감한 혁신성 부족이 유럽혁신시스템의 고유한 특징이 됐다.
유럽혁신시스템의 혁신지체와 파괴성 부족은 빠르고 과감한 변화의 속성을 지닌 IT기술이 3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하자 구조적 문제를 넘어 치명적인 결함으로 드러났다. 유럽은 IT기술 변화 초기에 모바일폰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했으나 애플의 아이폰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파괴적 혁신에 밀려 낙오자 신세로 전락했다.
그 결과 2010년 이후 유럽은 미국과의 IT산업 격차가 커지고 부의 격차도 크게 확대됐다. 이제 변변한 IT기업조차 없는 유럽은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에 거대한 자국시장을 다 내주고는 빅테크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로 대응하는 형국이다.
유럽 혁신시스템의 부진은 파괴적인 혁신기술을 대하는 정부정책에서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은 미국과 달리 혁신의 촉진보다는 혁신의 위험에 대한 사전 규제를 강조한다, 미국이 파괴적 기술혁신에 의한 변화와 성장효과를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럽은 기술의 사회제도적 역할 제고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대응 탄소배출을 관리하기 위한 탄소국경조정제도,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로 대변되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은 대표적인 유럽형 규제로 유럽시장에 진출하려는 다른 나라 기업들에게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런데 EU의 복잡하고 강한 규제는 자국 내 혁신기업들에게도 큰 부담을 주고 있다. ECB 자료에 의하면 지난 13년간(2008~2021) 유럽 유니콘(147개)의 약 30%(40개)가 본사를 해외로 이전했으며 대부분 미국으로 이전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EU는 혁신성장보다 사회문제해결을 위한 연구와 혁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관련 연구개발 투자를 크게 확대해 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혁신시장에서 나타나는 유럽의 혁신 위기 징후들은 그간 EU가 추진해 온 혁신정책의 기조와 그 전략들을 깊이 재점검해야 한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새로운 혁신 성장은 과감하게 혁신의 싹을 허용하고 수용하는 경제사회시스템 속에서만 가능하다. 강한 규제는 기업의 혁신활동에 장애가 되며, 특히 창조적 파괴와 속도 경쟁이 중요한 AI혁신에는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EU가 강조해 온 제도혁신을 통한 사회문제해결은 시장의 주체인 기업이 기존기술의 경제성을 뛰어넘는 신기술의 완결성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기후변화 대응 탈탄소화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혁신 격차 문제는 혁신의 기본 속성을 살리는 정책과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올해 초부터 우리나라는 유럽연합(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에 준회원국으로 공식 참여한다. 이는 유럽과의 과학기술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의 확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EU를 기술적, 정책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할 선도국가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협력의 전략적 효과를 창출하려면 유럽의 혁신시스템과 정책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우선 필요하다. 이제 유럽은 우리에게 벤치마킹과 함께 반면교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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