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어느날 경남복싱협회 박기봉 회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 동양의 파바로티라 불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오페라 가수 조용갑씨가 자기 고장(김해)을 방문 시민 교양 강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통화를 마치자 복서 출신 파이터 조용갑의 지난날에 사각의 링에서 펼쳤던 그의 경기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1970년 전남 흑산면 신안군 가거도 233번지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조용갑은 가난을 극복하고자 16살에 상경 성수동에서 용접기술을 배우면서 우여곡절 끝에 주경야독(晝耕夜讀) 서울 기계공고를 졸업한다.
21살 때인 1991년 그는 청량리에 위치한 코리아체육관( 관장 이봉제)소속으로 야심 차게 험난한 프로 세계에 뛰어들었다. 권투에 입문한 이유는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단체로 두들겨 맞으면서 복수심에 불타 체육관에 등록한 것이다.
그의 동생 조용인 (73년생)도 형과 비슷한 시기인 1992년 6월 프로에 전향 10년간 현역생활을 하면서 투타임 동양 플라이급 정상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보유한 형제 복서였다.
필자가 조용갑의 경기를 처음 지켜본 건 1991년 11월 13일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제21회 MBC 전국 신인왕전 때였다. 당시 라이트 웰터급으로 출전한 조용갑의 8강전 상대가 공교롭게도 필자가 소속된 88 프로모션 소속의 동갑내기 박원 (청담체)이었다.
필자는 박원 보조 세컨으로 이 경기를 차분하게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스피드가 다소 떨어지는 조용갑은 순발력에서 한발 앞선 박원의 에게 난타를 당한 끝에 3회 KO패를 당한다.
그해 신인왕 우승자이자 통산 17승(7KO) 1패 1무를 기록한 박원은 후에 동양 챔피언에 오르면서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톱 복서였다. 한편 조용갑의 동생 조용인은 1993년 1월 제22회 신인왕전에 플라이급으로 출전 결승전에서 역시 필자가 소속된 88 프로모션 임성태(청담)에게 6회 판정패 준우승에 머물렀다.
동생 조용인은 7년이 지난 2000년 2월 김태우에 판정승을 거두고 KBC 슈퍼 밴텀급 정상에 오른다.
탄력을 받은 조용인은 그해 6월 일본에 원정 동경 고라꾸엔 체육관에서 동양 슈퍼 밴텀급 챔피언 야마토 신을 8회 KO로 잡고 정상에 올라 3차 방어에 실패한다.
그리고 와신상담 2001년 12월 또다시 일본에 원정 15전 전승(12KO)을 달리던 아끼히로와 동양 슈퍼 밴텀급 타이틀 결정전을 펼쳐 1회 전광석화 같은 레프트훅 일발로 실신 KO 투타임 동양 플라이급 정상에 오른 만성(晩成)의 대기(大器)였다.
형보다 한 뼘 나은 복싱 재능을 보유한 동생 조용인은 6차례 해외 원정을 경험하면서도 18전 14승(8KO) 4패의 준수한 전적을 기록했다.
한편 1992년 2월 조용갑은 대원체육관의 4승 4패를 기록한 윤석현과 맞대결 6회 판정패를 당한다. 조용갑은 잡초복사 윤석현을 코너로 몰어 부치며 치열한 타격전을 펼쳤지만 2ㅡ0 근소한 차의 판정에 고개를 숙였다,
비록 패했지만 불퇴전의 타격전을 펼친 승부 근성은 높은 평가 받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20년 동안 현역생활을 하면서 통산 38전 26승(15KO) 12패를 기록한 윤석현은 그 경기를 발판으로 훗날 투타임 동양 웰터급 챔피언에 등극 정상급 복서로 활약했다,
난적 윤석현과의 경기가 끝나고 불과 40일 만에 링에 오른 조용갑은 신두일을 상대로 라이트급 랭킹전을 펼친다, 경기를 치룰수록 원숙미가 묻어나는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인 조용갑은 신두일을 상대로 군말 없는 판정승을 거둔다, 그후 국내 라이트급 7위에 랭크된 조용갑은 9전(5승)을 기록한 어느날 소리소문없이 링을 떠났다.
훗날 조용갑은 나는 얼굴이 넓고 커서 상대의 표적이 되기 쉬워 경기에서 많이 얻어맞았다. 그리고 팔이 상대적으로 짧아 복서로 대성하는데 여러 가지 헨디캡이 많아 경기중 힘들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링을 떠난 조용갑은 우연한 기회에 기타를 배우면서 자신이 노래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하루에 10시간씩 발성 연습에 몰입한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처럼 그의 뜨거운 열정과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가 나타난다.
이를 발판으로 1997년 27살에 꿈의 무대인 이태리로 떠난다. 조용갑은 그곳에서 유명한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수학하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소프라노인 레나타스코트 에게 최고의 목소리라는 극찬을 들으며 성장한다. 소질을 인정받아 용기백배한 조용갑은 이를 전환점으로 각종 콩쿠르대회에 출전 수많은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2008년 토티달 몬테 국제 콩쿠르 대회 1위를 차지 하는등 도합 28차례 우승을 하면서 이태리 에서 최고의 테너로 자리매김한다,
더불어 유럽의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주역으로 선 횟수도 3백회에 이르는등 오페라 가수로 확고하게 발판을 구축한다.
복서 출신인 그의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인생행로를 보면서 필자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올바른 선택과 방향이란 평범한 사실을 새삼 재확인한다.
여담이지만 무명복서 출신의 조용갑은 가수 조영남처럼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불렀던 성악 신동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복싱에서 체득한 강한 승부 근성과 끈질김으로 무장하면서 오페라 가수로 방향전환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라는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끝으로 가거도 섬마을 소년으로 자라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한국의 대표적인 오페라 가수로 변신한 복서 출신의 조용갑 그의 무궁한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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