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하굣길에 달려간 곳은 과학장난감 가게였다. 유리창 너머 전시된 무선조종자동차(RC카)를 쪼그려 앉아 바라보기만 며칠째. 외삼촌이 사준 RC카를 조종하던 아이는 최고 시속 300㎞, 최대 460마력의 레이싱 전용 스톡카를 운전하는 카레이서가 됐다. “RC카를 처음 본 날, 그때부터 차에 빠져들었죠. 3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차는 질리지가 않아요.” 49세 베테랑 드라이버 장현진(서한GP 소속) 얘기다.
지난해 장현진은 국내 최대 모터스포츠 오네(O-NE)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의 최상위 경기인 슈퍼6000 클래스에서 시즌 최우수선수(MVP) 격인 드라이버 챔피언에 올랐다. 1976년생으로 48세에 생애 처음이자 역대 최고령 드라이버 챔피언에 등극한 것. 종전 기록은 43세였다. 시즌 뒤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 선정 올해의 드라이버상 주인공도 장현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운전 잘하는 사람으로 공인 받은 것이다.
최근 만난 장현진은 “한국에서 1등 드라이버가 됐다는 생각에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기뻤지만 그 기분은 딱 1주일 갔다. 이제는 올라갈 일보다는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될 것 같아서 사실 부담이 많다”며 “그래도 앞으로 한두 번 더 챔피언에 오르고 싶은 욕심은 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에 자동차 계기판 제조업을 하고 튜닝숍 등을 운영한 장현진은 자차로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면서 관심을 넘어선 재능을 발견했다. “레이싱에 대한 열망이 넘쳤었죠. 언젠가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제가 서킷에서 운전하는 모습을 본 포항 용마 레이싱팀 단장님이 같은 팀에서 뛰자고 했어요. 그때 제 기록이 단장님을 훨씬 앞섰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2006년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현대차·기아 협력업체인 자동차 부품개발 테스트 회사를 다니는 ‘투잡러’ 장현진은 올해 데뷔 20년 차를 맞는다. 그런데도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슈퍼6000 클래스에서 여전한 경쟁력을 자랑한다. 레이스 직후 체중이 2㎏이나 빠지기에 경기 전 물만 3ℓ를 먹어야 하는 게 일상이다. 최대 거리 150㎞를 달리면서 엎치락뒤치락 승부를 가리고 코너에서는 몸무게의 3배(3G)에 이르는 중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데다 여름에는 섭씨 70도에 육박하는 차량 내부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장현진은 전체 9라운드로 치러진 지난 시즌 세 차례(2·3·4R)나 트로피를 품었다. “체력이나 반사신경은 젊은 선수들에 비해 조금 뒤처진다”고 인정한 그는 “경험에서 나오는 수싸움은 앞선다고 생각한다. 악바리 근성이 있어서 경기 후반부 정신력이 좋다. 앞에 누구라도 있으면 끝까지 따라가서 추월한다”고 자신했다. “눈도 침침해 야간 레이스는 확실히 불리하다”면서도 “‘맞아본’ 경험이 많다 보니 예측이 잘 되고 경험에서 얻는 우위가 있다”고 힘줘 말했다.
지난 시즌 슈퍼6000 클래스를 제패하고 세리머니를 하는 장현진. 사진 제공=슈퍼레이스
지난 시즌 슈퍼6000 클래스를 제패하고 세리머니를 하는 장현진. 사진 제공=슈퍼레이스
올해 장현진은 직전 시즌 랭킹 1위에게 주어지는 엔트리 넘버 ‘01’을 경주차에 달고 질주한다. 그는 “줄곧 06을 썼었는데 생애 처음으로 01을 달게 돼 어색할 것도 같다”며 “슈퍼6000 클래스 100번째 대회와 KARA 공인 100번째 경기에서 우승한 것을 생각하면 숫자 0, 1과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올해 뭔가 더 잘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이어 “같은 소속팀에서 한솥밥을 먹는 아들 장준호(20)는 숫자 10을 달고 있는데 룸미러에 비친 모습은 ‘01’로 보여서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들 준호군은 현대 N페스티벌 아반떼N1컵에서 뛰고 있다.
앞으로 뭘 더 이루고 싶을까. 장현진은 “지난해와 같은 기량을 2·3년은 더 유지하고 싶다. 세계적으로는 환갑이 넘어서 모터스포츠 우승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은퇴하고 나면 나중에 사람들이 ‘저 친구 운전 기가 막히게 했었는데’라고 기억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배우로 치면 레전드 배우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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