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루비콘강(江) 도하 사건(BC 49. 01. 10)
–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초석을 놓다!
이내주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
우리는 삶 속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릴 시 흔히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고 외친다.
[그림1 주사위 사진]
왜 자신도 모르게 은연 중 이러한 표현을 중얼거릴까? 바로 이 말을 처음으로 내뱄고 이후 역사에서 유행시킨 인물은 바로 이번 호 주인공인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이다.
[그림2 카이사르 흉상]
그는 서양 고대세계에서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더불어 가장 많이 알려지고 언급되는 인물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암살로 생을 마감하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미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에 의해 장엄한 연극으로 묘사된 바 있다. 그러한 유명세 때문인지 카이사르가 죽고 난 후 역사에 등장한 강력한 통치자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유한 시저(Caesar, 영어), 카이저(Kaiser, 독일어), 그리고 차르(Tsar, 러시아어)라고 불리었다.
이처럼 카이사르가 세계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던 극적인 계기는 바로 기원전 49년에 벌어진 루비콘(Rubicon; 라틴어 Rubico)강 도하(渡河, Crossing the Rubicon) 사건이었다. 이는 고대 로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공화정 로마를 심각한 내전(內戰)으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행동을 넘어서 공화정 로마에 정치적 및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고, 결국 로마의 정치 체제를 제정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왜 하필이면 이때 루비콘강을 건너야만 했을까? 당시 상황에서 ‘루비콘강을 건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기에 그토록 역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되고 있을까? 그의 도강(渡江)은 이후 로마사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번 호는 바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도하한 사건은 기원전 49년 1월에 벌어졌다. 이탈리아 반도 지도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당시 루비콘강은 공화정 로마의 공식적인 북쪽 국경이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건너간 루비콘강은 도대체 어떠한 강일까?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는 아펜니노 산맥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아드리아 해로 흘러들어가는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길이 80km의 작은 강이다.
[그림3 루비콘강 위치 지도]
고대 로마시대 때에는 이탈리아 본국과 갈리아의 키살피나 속주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강의 모양새나 크기가 아니라 그 위치가 지니는 상징성에 있었다. 군사원정을 위해 국경 밖으로 나갔던 장군이나 군대는 로마로 귀환 시, 로마 공화정에 충성한다는 서약의 의미로 일단 모든 무장을 해제한 후에야 이 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로마에는 군대가 무장한 상태로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을 금하는 법률이 있었다. 따라서 어느 로마군단이든 루비콘강 남쪽의 로마 영토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비무장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보다 엄밀하게는 강을 건너기 전에 사령관은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고, 홀로 비무장으로 로마로 들어와야만 했다. 군사력을 등에 업은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려는 공화정 로마의 법적 제어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대가 무장한 채 루비콘강을 넘는 것은 공화정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졌다. 물론 로마 명문가(名門家) 출신의 귀족이던 카이사르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아니었으리라. 예하 군단의 해체와 로마로의 귀환을 통보한 로마 공화정 최고 의결기구인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한 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기로 결단한 것이었다.
[그림4 원로원의 토론 모습]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티베르 강가의 미약한 부족집단이던 로마가 어떻게 강성하게 됐는지 카이사르 이전 시대를 거슬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반도 중앙의 라티움 평원에서 발걸음을 뗀 로마는 이후 왕정을 거쳐 공화정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무려 1세기 이상이나 북아프리카(오늘날 튀니지 지역)의 해상국가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Punic Wars, BC 264∼BC 146)에서 승리하면서 확고한 팽창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림5 포에니 전쟁 전체지도]
실제로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에스파냐 등지에 새로운 속주(屬州)가 생겨났다. 대부분 과거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땅이었다. 이로부터 얻은 막대한 부(富)를 바탕으로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넘어 동지중해 주변의 그리스 및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북쪽으로는 천연장벽인 알프스를 넘어 유럽 대륙 깊숙한 곳까지 영토 확장에 매진했다.
이러한 해외 팽창의 결과 로마는 다방면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했다. 대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겨룬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는 거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으로 변모해 갔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급격한 영토 팽창이 몰고 온 로마사회 내부의 변화였다. 로마 일반시민의 소득과 재산은 빠르게 늘어났으나 모든 세상사에 명암(明暗)이 있듯이, 정복지로부터 로마로 흘러들어온 엄청난 재화는 점차 로마 사회 내부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를 중시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온 로마인들의 전통적 가치관에 점차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일상화된 전쟁과 승전 덕분에 해외로부터 수많은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시골의 소농(小農)들은 노예노동을 동원한 귀족 지주의 대농장(라티푼티움)에 밀려 이농화(離農化)됐고, 결국에는 대도시 로마로 유입되어 빈민으로 전락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욱 증폭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이로부터 파생된 불만은 빠르게 누적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정치형태인 공화정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잘 읽고 적시(適時)에 대응하기에는 매우 비효율적인 제도임이 드러났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기득권층은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는커녕 넘쳐나는 재화를 독점하는 데만 급급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종료된 기원전 146년부터 기원전 30년경까지의 시기는 로마역사에서 사회 내부의 갈등이 심각하게 표출된 거대한 혼란기였다. 빠른 영토 확장의 결과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넘어가기 위한 진통의 과정일 수도 있었다. 막대한 치부(致富)를 발판삼아 거의 사병화(私兵化)된 군대를 거느리게 된 유력 장군들 간의 반목과 이합집산, 이로 인한 내전(內戰)과 반란(예컨대,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 등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시기였다.
[그림6 스파르타쿠단의 반란]
자연스럽게 대외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유력 장군들이 권력의 정상으로 올라섰다. 기원전 107년 군대와 평민계층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집정관(Consul; 원래 공화정 로마에는 평시에는 임기 1년의 선출직 집정관 2명이 권력을 분할해 행사하다가 국가 비상시에는 6개월 임기의 독재관 1명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음)에 선출된 후 거의 종신토록 연임한 마리우스(Marius)를 필두로 기원전 82년 종신 독재관에 오른 술라(Sulla)가 권력을 휘둘렀다. 반란과 진압, 응징과 복수가 다반사로 자행되고 있던 무정부적 상황에서 술라를 이어서 로마의 유력 지도자로 대두한 두 인물이 바로 폼페이우스(BC 106∼BC 48)와 카이사르였다.
[그림7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흉상]
한 사람은 동지중해에서 다른 한 사람은 갈리아 지방에서 거둔 군사적 성공을 기반으로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이후 두 사람은 정치권력 장악을 위해 정략결혼으로 장인과 사위 관계까지 맺는 등 초기에는 서로 의기투합했으나, 곧 권력을 다투는 비정(非情)한 경쟁 관계로 변했다. 먼저 우월한 입지를 점한 인물은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을 정복해 로마의 영토를 확장한 공로로 주가를 올린 폼페이우스였다.
열세하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 필적하는 대항마로 떠오를 수 있던 결정적 계기는 갈리아(현재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으로 당시 골Gaul 지방이라고도 불림) 정복과정에서 얻은 연이은 승전보였다.
[그림8 갈리아 지방 지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 지방 원정에 오른 카이사르는 이후 약 10년 동안 이곳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약 300개에 달하는 부족을 물리치고 무려 800개에 달하는 마을을 점령했다. 갈리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켈트족 계통 부족들을 차례로 평정해 나가면서 이들을 분할 통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우세를 점했다. 갈리아 지방에서 원주민 켈트족을 상대로 카이사르의 로마군단이 치룬 무수한 전투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알레시아 전투(Battle of Alesia)에서의 승리를 꼽을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카이사르는 긴 갈리아 정복사업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림9 알레시아 전투 요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알레시아 공방전은 기원전 52년 카이사르의 로마군단과 아르베르니족의 부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 BC 82∼BC 46)가 이끈 갈리아 부족 연합군이 격돌한 싸움이었다. 젊은 베르킨게토릭스는 강력한 로마군에 대항해 승리하려면 우선 흩어진 갈리아 부족들을 자신 휘하로 규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강력한 지도력과 잔인한 규율을 앞세워서 갈리아 부족들을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기원전 52년 총궐기에 들어간 베르킨게토릭스는 초토화 작전으로 로마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족들의 결속력이 약화된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는 알레시아 요새에서 로마군에 의해 포위된 채 벌인 장기 공방전에서 패하면서 로마군 격퇴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림10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알레시아 전투 승리로 카이사르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정복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갈리아 주둔 로마군단의 진정한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 과정(BC 59∼BC 51, 약 9년간)을 『갈리아 전기』라는 책자로 후세에 남기었다.
[그림11 라틴어 갈리아전기 표지]
알레시아 공방전의 승리로 카이사르는 마침내 갈리아 전체를 로마에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어느 시대에도 동시에 두 명의 권력자가 공존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과거의 친분관계는 벗어 던진 채 곧 생사를 건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장기간 변방인 갈리아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국내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단독 집정관으로 추대되며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했다.
집정관에 오른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50년 원로원 명(命)으로 카이사르에게 예하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복귀하라는 소환 명령을 발했다. 말이 소환이지 이에 응할 경우 카이사르는 혈혈단신으로 호랑이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까딱하면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몰랐다. 원로원 명령에 순응하여 로마로 갈 것인가, 아니면 로마(국가)의 반역자가 될지언정 폼페이우스와 일전(一戰)을 벌인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카이사르는 결국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휘하의 정예 1개 군단병력(약 4,500명)을 이끌고 공화국 로마와 속주의 경계선이던 루비콘강을 넘어섰다.
[그림12 루비콘강을 도하하는 카이사르]
그러면 루비콘강을 넘어선 카이사르와 그가 이끈 군단의 운명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루비콘강을 건넌 후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 병력을 이끌고 곧장 로마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는 로마가 내전에 휩싸이게 된 상황을 의미했다. 이제 로마에서 원로원과 한 패를 이루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넜을 때 이미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그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군사적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두 실력자 간에 벌어진 내전은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5년까지 무려 5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초반 판세에서 열세에 처했던 카이사르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로마로 진군해 일단 로마정치의 심장부인 도시 로마를 장악했다. 이어서 즉각적으로 폼페이우스와 그의 추종세력을 제압하는 국면으로 돌입했다. 먼저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후 폼페이우스의 세력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동지중해 방면으로 향했다. 쌍방 간 전투는 주로 그리스반도에서 벌어졌다. 수차례의 충돌과 조우 끝에 마침내 양측은 기원전 48년 8월 그리스 내륙에 있는 파르살루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여신은 지휘관에 대한 충성과 신뢰로 뭉친 카이사르 군단의 손을 들어줬다. 패배 후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가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암살당하면서 두 사람 간에 벌어진 권력투쟁도 막을 내렸다.
이제 숙적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카이사르는 위풍당당하게 로마로 귀환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서 제반 개혁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내전 동안 폼페이우스를 지지한 원로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자신이 종신(終身) 독재관으로 취임하여 국가의 중요한 권한을 장악했다. 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기득권층인 원로원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로마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공화정’을 위협하려는 자는 그가 누구든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진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림13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는 재차 내전에 휩싸이게 됐다. 결국 이러한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바로 카이사르의 양자(養子)로서 로마 역사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로 불리는 옥타비아누스(BC 63∼AD 14)였다.
[그림14 옥타비아누스 동상]
카이사르 필생의 꿈이 자신의 입양아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神)으로 축성했다.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됐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본인이 남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이외에 당대에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 주고받은 서신과 키케로의 연설, 이후 수에토니우스 및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 사건은 이후 로마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앞에서 살펴본 내전에서 승리자가 되면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카이사르는 무려 2천 년에 육박하는 긴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직접적으로 카이사르의 군사적 업적은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을 이끌었고, 그의 정치적 행보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국가 정상에 있던 짧은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이후 로마가 세계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줬다. 그가 암살을 당한 이후 로마는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카이사르가 실행한 개혁과 군사적 유산은 오랫동안 로마제국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유형적 측면으로는 도시 로마를 감싸고 있던 성벽을 허물었고, 무형적 측면에서는 수천 명의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오늘날 로마문명의 우수한 특징으로 평가되는 개방성과 포용성의 토대를 세운 셈이었다. 바로 이러한 특징에 힘입어 이후 로마가 강성한 제국으로 긴 세월 동안 유지될 수 있었음을 고려할 때, 카이사르야말로 짧게는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를 개막하고, 길게는 천년 제국 로마의 머릿돌을 놓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림15 로마의 평화 시대를 연 5명의 황제들]
로마의 미래 발전을 위해 카이사르가 행한 진정한 기여는 바로 대외적인 영토 확장이었다. 이탈리아반도와 지중해 연안으로만 치우쳐있던 로마의 영토를 알프스 너머의 드넓은 평지가 펼쳐진 갈리아 지방까지 넓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로마 공화정 하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갈리아 지방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자신이 직접 4개의 로마군단을 이끌고 현지에서 거의 10년 동안이나 장병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과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서유럽 세계의 핵심부인 갈리아를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긴 안목에서 볼 때, 그리스문명을 이은 로마문명이 오늘날까지 서유럽 세계의 기본 토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림16 팍스 로마나 시기 로마제국의 영토]
더불어 그의 이름으로 채택된 율리우스 태양력은 16세기 말에 그레고리우스 태양력으로 대체될 때까지 거의 1,500년 이상 서양인들의 삶과 일상의 흐름을 통제했다. 이를 기리기라도 하듯 7월(July)은 바로 율리우스(Julius)라는 그의 라틴어 이름에서 연유됐다.
마지막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카이사르가 위대한 통치자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던 출발점은 그가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4개의 로마군단을 지휘한 군사령관 신분으로 갈리아에서 무려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양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는 타고난 군사적 능력을 과시했다. 전쟁의 향방을 조망하는 전략적 측면은 물론이고 세부적인 전술적 측면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원정지에서 수행한 다양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기동력을 중요시하는 전략을 축으로 삼아 전투 중 적군의 약점을 빠르게 포착하고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펼쳤다. 이를 위해 병력의 분산과 집중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특히 보급로의 확보와 군수물자 공급을 매우 중요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말단 병사들과의 접촉과 신뢰를 중시해 리더로서 부하들의 진정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그는 로마 군단병들의 존경과 충성을 한껏 받은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그림17&18 로마군단 & 군단병 모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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